길거리 노숙자로부터의 배움
2008년 9월 초
문제의 그날은 무더위는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이었다.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친정 언니네 집으로 며칠 쉬러 간 사이, 늦은 퇴근 아무도 없이 정적만 흐르던 아파트에서 샤워를 하고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소파에 널부러져서 저녁을 무엇으로 한끼 때울 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낯설고 다급한 목소리로 한 남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000님 안녕하세요? 저는 00 군청 000이라고 합니다"
"네, 그런대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나도 순간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 조금 전에 00 경찰서에서 저희 사무실로 연락이 와서 000님께 연락을 한 겁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경찰에서 00면 인근 도로가에서 한 외국인이 비를 맞고 노숙을 하려고 하여 일단 00 지소로 데려와 보호조치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요?"
"행려자는 저희가 안전하게 관리를 해야 하는데 이 시간에 영어가 가능한 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이런 촌에서 그런 분을 섭외가 불가해서, 여러 경로로 알아보니 관내 기관에서 일하고 계신 000님께서 영어가 가능하다고 하여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도움을 요청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움을 주려면 이 비를 뚫고 다시 40여분을 운전해 가야 하는데...
"네, 알겠습니다.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00군 00면 00 치안센터(지구대)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다시 옷을 챙겨 입고 폭우를 뚫고 급하게 현장으로 향했다. 문제의 행려자, 노숙자 또는 이방인! 이 밤에 저녁도 못 먹게 하고 나를 고생시킨 그 장본인과 현장에서 마주했다.
그와 간단하게 영어로 통성명을 하고 그가 왜 그곳에서 노숙을 하려 했는지 물었다.
그는 캐나다 퀘벡출신의 '쟝(Jean)'이라는 예순을 바라보는 백인남성. 행색은 아주 초라해 보이지만 얼굴은 아주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8년째 대형유모차를 개조한 순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걸어서' 세계일주 중 오십여 번째 방문국으로 우리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한국에 온 지는 며칠 안 됐고 서울을 출발해 평택~천안-대전-금산-익산-함평 등 전남지역과 제주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 후 필리핀, 대만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는 계획으로 이동 중인 무전 여행자였다.
그렇게 그의 일정대로 가던 길에 비도 많이 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황, 익숙한 듯 길가에 허름한 텐트를 치고 있던 중에 순찰을 하고 있던 경찰분들이 발견하고 그를 일단 인근 지구대로 데려와 해당 군청에 연락했던 상황이었다. (한적한 시골마을, 논만 보이는 곳에서 비 오는 날 저녁, 백인 남성이 황톳길 바닥에 텐트를 치고 있는 모습은 생경할 수밖에 없었을 듯함)
일단 그의 신원이 특이사항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군청 직원은 모든 궁금증도 해결되어서 그를 안전한 곳에서 보호조치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던 터, 담당직원은 뒤발씨를 인근 모텔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보는 이방인이지만 그의 눈빛에서 '진실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임신한 아내가 있으면 어려운 상황이었겠지만 마침 아내도 부재중이어서 나는 차라리 그분만 괜찮다면 우리 집으로 데려가 한국인의 정도 느끼게 하며 하룻밤 편히 쉬어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쟝씨는 자기는 어떤 배려도 좋다고 그저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갈아입을 옷만 간단히 챙겨 작은 배낭과 함께 내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40여분을 다시 달려 대전으로 왔다. 일단 나도 몹시 허기진 상태, 그도 마찬 가지였을 듯하여 식당으로 우선 그를 데려갔다. 뭐든 잘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주저 없이 한식 메뉴를 시켰다. 시원한 맥주부터 마시며 그의 진지한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50세가 되던 무렵
수십 년간 이어진 출근-직장-퇴근 이런 삶의 연속에서 많은 피로감과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자신이 싫었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 중대 전환점에서 그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부인에게 그의 생각을 진지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가 이뤄둔 것을 다 포기하고 걸어서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계획(2000~2012/걸어서 무전여행)을 아내에게 했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은 이제 막 열 살 전후의 형제 아이들이 있었다. 그 모든 육아 부담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 미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고 한다.
다만, 딱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냥 '단순여행이 아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여행을 떠나라'라는 조건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전 세계 아이들에게 인권, 평화, 평등을 가르치고 그 가치를 공유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남편이 여행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실시간으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특급 도우미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했다.
음식이 나오자 둘 다 많이 허기졌던 터라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그도 맵고 짠 한식을 주저 없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배도 부르고 맥주 한잔에 몸에 온기가 퍼져나갈 때쯤 자리를 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리 집으로 걸어 이동을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서재로 쓰던 내방을 쓰도록 하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줬다.
며칠을 제대로 못 씻었을 듯 하여 나 나름의 배려였다. 얼마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의 얼굴은 빛이 나는 듯했다. 그는 연신 내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냉장고를 열어 맥주캔을 꺼내와 하나씩 마시며, 늦은 밤까지 우리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주로 그가 여행하면서 겪었던 일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인도에서 눈에 이상이 생겨 걱정하고 있을 때 무료로 치료해 준 현지 의사 이야기, 안경이 부러졌을 때 공짜로 해준 현지인, 또 어느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로 이동해야 하는데 비행기표가 없었는데 기꺼이 비행기 표를 구해준 이야기... 처음 본 사람들이 왜 낯선 이방인들에게 그런 호의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해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많은 시간을 얘기를 하다 보니 그 답은 바로 '진실함'이 아니었을까. 그의 여행 취지를 이해한 현지인들도 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당시에 살아계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며칠 전 TV프로그램에서 그의 이야기를 본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확인해 보니 그 방송에서 본 이가 뒤발씨가 맞았다. 이런 인연이...
나는 그의 다음 일정을 물었다.
그는 날이 밝으면 낮에 처음 만난 곳으로 다시 가서 짐을 챙겨 익산 쪽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며칠 뒤에는 함평 쪽 어느 시골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과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거기서도 어린이들에게 그런 인류 보편의 가치들을 얘기하고 공유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밤은 깊어가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처음 세계일주를 떠날 때 아이들이 열 살 전 후 였던 아이들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영락없는 개구쟁이 아이들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최근 사진을 보여주었다. 벌써 완연한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는 동안 본인도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백발이 성성해졌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는 않은지 물었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그가 말했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아이와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해해 주고 양보해 준 덕에 자기가 한 결정과 행동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인생 최종 목표를 물었다.
그는 세계일주를 하며 겪었던 모든 일들을 아내와 함께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그 내용을 정리해서 책을 출판할 것이고 그 수익금, 그에게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공익재단을 만들어서 전 세계 어려움에 처해있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그의 눈은 피로한 기색은 전혀 없고 대신 그의 의지가 강렬하게 이글 거림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대단한 '두발로'씨다. (원래 이름은 '쟝 Jean'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인데 한국을 여행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두 발로' 걸어서 여행한다고 하여 '두발로'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한국식 조찬을 그에게 대접했다.
역시나 맛나게 잘 먹어주는 그에게 고마웠다. 모닝커피 한잔씩 하고 집을 나와 그의 짐을 보관해 둔 곳으로 함께 이동했다. 내가 미리 준비한 우리나라의 달콤한 사탕봉지를 그에게 전했다. 무척 좋아했다. 걸으며 힘들 때 아주 좋은 간식이 될 거라고 하며 순둥이 아이들 처럼 기뻐했다.
그가 짐을 챙겨 떠나기 전에 이것도 큰 인연이다 싶어 함께 사진을 찍기로 했다. 뻘쭘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남자끼리 어색할 수 있지만 짧은 시간이었는지 서로의 진심이 통했는지 아무 거리낌 없이 뜨거운 포옹으로 그와 작별의 시간을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조금은 생뚱맞지만 그가 나중에 책을 내게 되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단 몇 줄이라도 넣어줄 것을 부탁했더니 그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며 그의 홈페이지와 캐나다 연락처를 메모해 주었다. 그와 그렇게 작별인사를 한 뒤 그가 만든 손수레를 끌고 길 모퉁이를 돌아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그의 앞날을 기원했다.
지난 12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던 낯선 캐나다 아저씨를 이러저래해서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우리 집에 초대해 늦은 밤까지 대화를 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넌 나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강한 자극을 해준 그. 그와의 이별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감정들이 묘하게 섞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와 작별을 하고 몇 년이 지나서 그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알려줬던 그의 아내가 관리했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봤다. 역시 그의 말대로 그는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캐나다로 복귀해서 재단을 만들어 그가 말했던 계획을 실천하고 있었다. 내가 해준 게 별로 없는데 왜 이렇게 뿌듯하던지...
그와 우연한 만남, 긴 여운이 남는다.
혹시 캐나다 퀘벡에 갈 일이 있으면 그를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이제는 나이가 여든을 넘긴 완전 할아버지일 텐데 나를 기억이나 해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