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끊고 얻은 것과 잃은 것

보통의 감성

by 바람아래

만삭의 아내 앞에서 쓰러진 날이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연말 송년회 자리였다. 과장, 팀장, 팀원들과 그 배우자들까지 함께한 자리. 즐겁게 회식을 마치고 나오려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사람들 앞에서 쓰러졌다.


의식은 없었지만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적잖이 놀란 듯했다. 특히 아내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그 일이 있은 후 바로바로 술을 끊지는 못했다.


사실 나는 술 분해 능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은 우체통처럼 빨개지고 회복도 느린 편이었다. 그런데도 '사회생활'이라는 명분 아래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물론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때도 많았다.


한 번은 같은 대학을 졸업한 직장 선배가 자리에 초대했다. 기분 좋게 각자 주량만큼 좋으련만 그 선배는 그렇지 못했다. '원 샸'을 줄기차게 외쳐댔다. 여러 번의 술잔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는 나에게 계속 술을 마시게 했다. 이미 내 주량의 한계치에 다다랐다. 그때부터는 기분 좋은 술자리가 아니라 좋게 말하자만 자존심, 나쁘게 말하면 오기였을까. 마음속으로 '오늘 한번 갈데 까지 가보자'라는 독기를 품고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그가 따라주는 술을 다 받아마셨다. 물론 내가 받은 만큼 그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술자리는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5분, 10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봐도 받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보니 그곳에도 그는 없었다. 그가 먼저 도망간 것이었다.


다음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출근을 하자마자 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서는 '선배님, 오늘 한 잔 더 하시죠?' 하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야 이제 술 못 마시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나에게 강제로 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독기를 품고 대작을 하면서 그에게 엄청난 알코올치료를 해준 듯했다. 물론 내 위장도 무탈할리 없었다. 그렇게 첫 직장에서는 주 8일 술을 마셨을 정도였다. 젊음을 믿고 무모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2016년, 뉴질랜드로 1년간 연수를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그곳의 평온함 속에서 술은 자연스레 줄었다. 대신 햄버거, 라면, 피자 같은 고칼로리 음식에 빠져들었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체중은 10kg 가까이 늘어있었다. 건강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모든 수치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로 술과 고칼로리 식품을 끊고, 아침저녁으로 헬스장에서 2시간씩 운동했다. 두 달이 지나자 체중이 줄기 시작했다.


문제는 술을 끊는 과정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안 마시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한 마디씩 했다.

"술 잘 마시잖아? 왜 안 마셔?"

"나도 마시는데… 너만 건강 챙기냐?"

"그래, 혼자 만수무강해라!"

"몸이 안 좋아? 알코올로 몸속 청소하면 돼!"

"딱 한 잔만 해!"


끝도 없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더 이해가 안 되고 힘들었던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를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싫었다. 그래도 한번 결단했으니 끝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자 저녁 술자리 제안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됐다. 그런데 처음엔 그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점점 술자리 초대가 줄어지던 나는 내 존재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워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오히려 나를 아예 부르지 않는 그들에게 서운했던 때도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저녁의 여유가 생기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한창 아빠와 놀고 싶어 하던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매일 운동하는 습관이 생겼고, 건강 수치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즈음 또 하나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굳이 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술자리 대신 점심 자리였다.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충분히 유지됐다. 오히려 술자리 대화보다 맨 정신의 대화는 훨씬 진지하고 깊었다. 특히 메르스와 코로나를 거치면서 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시대가 내 편이 되어주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생겨 난 여유시간은 다른 것들로 채웠다. 인문학 책을 읽고, 강연을 찾아다니고, 동네 미술관에 발길을 들였다. 남들이 술 한 병 더 마실 시간에 나는 나의 세계관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오히려 더 좋은 대화거리가 됐다. 승진, 근평과 같은 매번 똑같은 스토리 또는 누군가의 험담으로 끝나는 술자리보다,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감정을 공감해 주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됐다.


술을 끊기 전에는 음주 후에 남는 건 속쓰림, 두통, 카드값 영수증 그리고 후회뿐이었다. 하지만 술을 끊고 10여 년이 지나고 보니, 술을 마시던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곁에 남았다. 술로 쌓은 관계는 술이 없으면 흔들린다. 하지만 술 없이 쌓은 관계는 생각보다 단단함을 알게 됐다.


#술 #금주 #관계 #사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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