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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없는 작가 Sep 02. 2024

엇배기 농부

                                                   


  조상들은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위치로 시간을 추측하고, 절기의 변화를 알았다.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은 백성들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땅을 일구고 땅이 주는 것만을 얻어 가족을 먹이고 짐승을 챙기는 일은 하늘의 움직임을 잘 살피고 있음이다. 

  나도 절기를 읽는 농부가 되었다. 어머니가 남긴 비알밭을 놀릴 수 없었다. 밭둑이라 말하기도 산자락이라 말하기도 어중간한 곳에서 밭이 있다. 첫발을 뗄 때 거친 밭고랑이 야속했다. 해도 해도 나보다 더 키를 세운 풀들, 조금 나아지는가 하면 산짐승과 나란히 소출을 나눠야 했다. 드문드문 밭을 찾는 나를 얕보는지 저들이 주인이고 오히려 내가 손님이었다. 나보다 먼저 땅콩을 파헤치고, 마침맞게 익었다 싶은 옥수수를 하루 먼저 싹둑 따버렸다. 그렇게 산짐승들과 나누고, 잡풀들과 함께 싸우다 보니 몇 해가 지났다.  

  봄이 저만치 보이면 거름을 뿌린다. 조금은 두껍다 싶은 정도로 거름을 깔고 땅을 갈아엎는다. 그런 다음 거름이 얼마나 땅에 잘 스며드는지, 바람은 적당한지, 햇볕은 따사로운지 수시로 살핀다. 내일의 날씨와 일주일의 기온을 자세히 알아본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얼마만큼 부는지 알아보는 것도 일과이다. 

  농사 달력을 펼쳤다. 농막 한가운데 걸어놓고 수시로 눈도장을 찍는다. 산비탈에는 아무래도 짐승이 들 수 있으니, 들깨를 심고 밭고랑 한가운데는 고추, 가지, 오이를 심을 요량이다. 그리고 밭 입구에는 여러 가지 상추를 심어 풍요로운 식탁을 채워야지. 밭고랑의 개수를 나누는 것도 작년과 비교해 늘리거나 줄이거나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농사 달력에는 월별로 심어야 하는 것과 수확의 때를 빼곡하게 적어두었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침저녁으로 아직은 쌀쌀하다. 밭둑에 서서 땅심을 두드리고 언제쯤 무엇을 심을까, 작년에 심었던 것은 어땠는지, 그래서 무엇을 심어야 할까, 밭둑에서 내려와 밭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이제는 찬바람이 빨리 물러가기를 바라고 하늘이 더 맑아질 때를 기다린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지금, 몸과 마음이 바빠진다. 밭에서의 올해 농사가 풍성하기를 바라며 밭 밟기를 마친다.

  씨감자를 반으로 잘라 볕이 적게 드는 베란다에 두었다. 초록 창에 검색하니 주말 기온이 이십 도에 가깝다. 감자 심기에 적당해 보인다. 지난주에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깔아두었다. 멀칭비닐에 구멍을 뚫어 싹이 난 감자를 손바닥 깊이만큼 묻었다. 그러고는 감자를 넣고 햇볕이 이곳까지 닿지 못하도록 흙으로 덮는다. 어머니가 남긴  볏짚을 태운 재를 묻히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건너 건너 들은 씨감자의 소독도 아랑곳없이 흙으로 덮었다. 흙속에서 감자는 어둠을 먹고 쭈글쭈글한 제 몸을 싹을 틔울 것이다. 

  곡우穀雨, 봄비 내리면 모든 작물이 잠에서 깰 것이다. 그동안 파종한 것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자주 하늘을 바라본다. 맑은 하늘에 비 소식을 기다릴 수 없다. 호스를 당겨 아침저녁으로 물을 준다. 수돗물이 땅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리는 비를 자꾸만 기다리며 마음을 모은다.

  한 달 전에 뿌린 시금치 씨앗이 깜깜무소식이다. 서둘려 농사 달력을 살폈다. 봄 시금치 파종은 4월에서 5월이라 적혀 있는데, 3월 초에 기온이 오르기에 내 시간에 맞춰 씨를 뿌렸다. 하루 이틀 기온이 높아 안심했다. 일주일 만에 밭에 나가니 시금치 밭이 영 꿈쩍을 하지 않는다. 또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 춘분도 되지 않는 때라 어둠이 급하게 내렸다. 애만 태우다 서둘러 마무리하고 집에 왔다.

  낮의 더위가 한풀 꺾이면 밭에 나가 고추를 딴다. 한낮의 농부는 강한 햇볕에 고개를 들 수 없지만, 고추는 이파리 사이로 제 몸을 골고루 붉게 물들인다. 고추를 따다 보면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도 쉽지 않다. 행여나 놓친 게 있는지 종종걸음으로 고랑을 헤집고 여러 번 다니며 고추를 딴다. 수확한 고추는 거실에 돗자리를 깔고 펼쳐놓는다. 가장자리부터 시작해 마른 수건으로 하나씩 고추를 닦는다. 여름 볕을 견딘 고추의 맵고 매운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다.  

  더위가 그칠 때다. 기승을 부리던 풀도 햇볕에 누그러진다. 모기가 사라지고 귀뚜라미가 하나둘 나온다. 처서가 든 이맘때는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는다. 배추 새순이 돋아나 집게손가락만 하게 자라면 수시로 배추밭에 가야 한다. 하루에 두어 시간씩 배춧속을 뒤집으며 벼룩잎벌레, 배추좀나방이 있는지, 나무젓가락이나 핀셋을 들고 살핀다. 어린 새순일 때 벌레를 잡지 못하면 구멍이 숭숭 뚫린 이파리를 보게 된다. 고랑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 사이 서늘한 바람이 분다. 

  농사짓기는 퍼즐을 맞추는 일이다. 몇 조각의 퍼즐을 끼우다 보면 태양의 기울기가 변하는 것을 알게 된다. 높이 뜬 달님도 작물의 속삭임을 내려다보며 걱정을 보태기도 한다. 어설픈 엇배기 농부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다 알아가지는 못하지만, 땅이 주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하늘이 주는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해와 달이 만드는 계절의 시간표는 정확하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돌아간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때가 되면 싹이 난다. 싹이 나기까지의 기다림을 인내하면 열매를 맺는다. 나는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고 별을 향해 자주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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