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의 문턱이 낮아 선뜻 들어서는 걸음이 가볍다. 어디론가 가려는 듯 어머니와 아들 형상의 모자석이 길손을 맞는다. 그뿐인가. 하늘의 구름이 내려와 앉은 천운석, 마당에 떡하니 앉아 복을 부르는 복두꺼비,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바위, 학봉선생구택(鶴峯先生舊宅)에는 형상들이 주인이다.
참봉 김용환 선생은 희대의 기인이었다. 안동의 양반 부호들에게 은밀하게 자금을 받고 강제로 모금도 하였다. 대대로 내려오던 땅 13만 평을 팔아 보태고 300년을 내려오던 학봉종가를 팔았다. 그러면 문중에서 다시 사들이고 팔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고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참봉이 별시別市가 열리면 어김없이 노름판에 나타났다. 노름판에는 전국의 한량과 노름꾼들이 모여들었다. 새벽녘까지 판돈이 부풀면 참봉은 엉뚱한 행동을 벌였다. 화가 난 듯 첫닭이 운 뒤의 갑오(9끗)만도 못하다며 판돈을 몽땅 머흐럽게 생긴 상대에게 침 한 번 뱉고 줘 버렸다. 또 새벽 몽둥이야! 라고 소리치면 누군가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판돈을 빼앗아 가 버렸다.
참봉은 매사에 철두철미했다. 일부러 노름판에서 낯선 한량이나 투전판에서 거금을 날렸다는 소문을 냈다. 명분을 만든 셈이다. 여름에도 참봉의 사랑방에는 화롯불이 꺼지지 않았다. 독립군에게 지원한 자금을 적바림한 종이 쪼가리,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철저히 태워 없앴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천하의 노름꾼, 파락호(破落戶)라 불렀다.
김 참봉은 스스로 손가락질받는 사람이 되었다. 세간의 불명예스러웠던 온갖 소문들을 뒤로한 그는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피를 나눈 동지가 아들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을 때도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의로운 일은 숨겨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수치스러움을 감당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퍼주었던 참봉, 나라 사랑하는 일에 한 사람의 선 굵은 행동으로 우리는 백 년이 지나 그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주목朱木이 고택 곳곳에 있다. 별다른 주목注目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관심을 받은 나무가 주목이다. 선생도 살아서는 노름꾼, 한량, 파락호로 기억되다 지금에서야 사철 푸른 성품이 알려졌다. 선생은 살아 백 년도 못 살았지만, 그 정신은 죽어 만 년이 갈 것 같다.
내 아버지도 별시가 열리는 곳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돈을 따기 위해 눈동자가 번뜩이는 날이었다. 노름꾼들이 깔아 놓은 멍석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이 넘쳐났다. 종지 안에 윷을 넣고 아버지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고는 종지를 흔들며 멍석 가운데로 던졌다. 아버지는 놀이로 가산은 탕진했고, 꾼들에게는 만만한 허릅숭이였다.
오일장, 대폿집 모퉁이에 노름판이 생겼다. 화투 몇 장을 손가락에 끼우고 콧김을 불어 기를 모았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는 눈치 싸움에 배포를 부려보지 못하고 화투장을 일찍 내려놓았다. 마지막에 다 털리면 개평 몇 푼 얻어 독주를 마셨다. 아버지가 말하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김 참봉이 교차한다. 아버지는 내일을 속절없이 기다렸지만 김 참봉은 내일을 열기 위해 돈과 명예를 다 던졌다. 아버지는 입으로 세상을 탓했지만 김 참봉은 몸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종택을 한 바퀴 돌아 사랑채 마루에 앉는다. 마루 구석에 빛바래고 먼지 쌓인 방명록이 펼쳐져 있다.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누군가 “사랑채 제비처럼 처마 밑에라도 깃들고 싶다.”라는 글을 남겼다. 나 또한 잠시 눈을 감고 파락호, 그 숨은 뜻에 깃들어본다.
바람 소리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본다. 먼 봉우리 위에 구름 몇 점 하얗게 내려다보신다. 나는 여기서 살아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버지와 참봉을 기억한다. 이제 죽어 천년 간다는 나무 아래 참봉이 품었던 때를 넘어 더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