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재혼가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1)

18세기 창작, 국문장편소설 <임씨삼대록>의 설씨 가문

by 규방즈

<콩쥐팥쥐전>과 <장화홍련전>의 계모들

고전소설에서 ‘계모’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두 작품이 있지요. <콩쥐팥쥐전>과 <장화홍련전>입니다. 두 작품 모두 재혼가정을 소재로 한 작품이면서, 후처/계모는 악한 어머니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콩쥐팥쥐전>에서는 팥쥐의 어머니가, <장화홍련전>에서는 허씨가 그렇습니다.


두 작품에서 각각 전처/친모의 자녀인 콩쥐, 그리고 장화 홍련 자매가 계모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습은 서로 다른 면이 있지만, 어쨌든 두 작품은 모두 ‘착한 전처 자녀’와 ‘악한 계모’를 형상화합니다. 대체로 전처 자녀들은 악한 계모에게 효를 다하거나 고통을 감내하고, 계모들은 나중에 벌을 받으며 끝나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서사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8세기에 창작되어 20세기 초까지 향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문장편소설 <임씨삼대록>입니다.


후처 영입의 공식적 명분 :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하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처럼, <장화홍련전>에서 아버지 배좌수가 후처 허씨와 재혼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콩쥐팥쥐전>에서도 아버지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딸인 콩쥐 하나만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보통 고전소설에서 후처를 들이는 명분은 대체로 후사를 잇기 위한 것인데요.


<장화홍련전>만을 가지고 이야기해봅시다. 이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구활자본 <장화홍련전>에서 계모 허씨는 배좌수와 혼인한 후 아들을 하나 낳습니다. 바로 ‘장쇠’입니다. 이복 누나인 장화를 연못까지 끌고 가 물에 투신하게 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호랑이에게 잔인하게 물려 뜯긴 채(아마도 하늘의 심판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겨우 목숨을 건져 집으로 돌아오는 그 아이입니다.


계모 허씨는 장화가 시집갈 때가 되자, 남편 배좌수로부터 장화의 혼인 준비를 부족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듣습니다. 이 사건은 장화에 대한 계모의 직접적인 살해 동기가 되지요. 장자를 위주로 재산을 상속하던 시절, 딸에게 재산을 넉넉히 나누어줄 수 있었던 때는 바로 딸이 시집을 갈 때였습니다. 남편의 말을 들은 계모는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전처의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그럼 내 아들은? 이 집의 유일한 아들인 내 아들 장쇠는? 그리고 나는?’


이처럼 <장화홍련전>에서 재혼가정의 갈등은 ‘장자상속’이라는 재산 분배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셨나요?

국문장편소설 <임씨삼대록>의 설씨 가문의 경우는 좀 다른데요. 이 집안도 <장화홍련전>의 배좌수네와 같은 재혼가정입니다만, 갈등의 양상이 좀 달리 그려집니다.


모든 사단은 설씨 가문의 가장인 ‘설천’의 재혼에서 시작됩니다. 설천은 이미 전처인 화씨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요. 즉,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해서 재혼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굳이 재혼을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성품이 아주 고약한 ‘목씨’를 후처로 들입니다. 왜일까요?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아내로서, 그리고 내 아이들을 살뜰히 돌보아 줄 어머니로서, 왜 하필 심성이 악한 목씨를 후처로 맞이했을까요? 바로 “혈기 왕성한 나이”에 자신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설천은 목씨가 성품이 고약하다는 걸 알기에 온갖 집안 살림으로부터 그녀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이것은 설씨 가문 내에서 목씨의 지위가 굉장히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당시, 여성이 집안 곳간의 열쇠를 쥔다는 것은 집안의 재산 관리와 관련한 권한을 갖는다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목씨에게는 그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설천은 오히려 그 곳간 열쇠를 후처인 목씨가 아니라 며느리에게 줘버립니다. 설천이 후처 목씨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겠죠?


그런데 설천은 한편으로는 집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후처 목씨와 부부지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심성도 악하고, 자기 자녀들을 괴롭히는 후처와 부부지정을 나누다니? 그리고 곳간 열쇠도 며느리에게 줘버렸으면서? 그 자체로 비합리적입니다.


설천의 이러한 행동을 그의 자식들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판단과 후처 영입의 진의를 더욱 의심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시는거예요?!’


가장의 죽음, 남겨진 계모와 전처 자녀들

제가 생각할 때, 이 가족의 서사에서 가장 고구마 구간은 바로 여기입니다. 재혼한 지 오래지 않아 가장인 설천이 죽어버리고, 이제 계모 목씨와 그의 전처 자녀들만 남게 되거든요. 이들의 이야기를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 일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벌써부터 가슴 속에서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계모의 입장이든, 전처 자녀들의 입장이든 간에, 앞으로 한 집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서사는 전처 자녀 중 아들인 설연창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설연창은 계모 목씨에게 지극정성을 다합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를 낳아준 어머니도 아니며, 또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새로운 형제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은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절대 규범인 ‘효’를 다해야 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또…좀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계모가 죽은 후 재산을 나누어야 할 이복 형제가 없으니까 계모를 모시는 것이 큰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했겠지요?


제삼자의 입장에서 얼핏 보면, 아들이 계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요. 그것이 도리이기는 하기 때문입니다. 계모가 악한 사람이든 어쩌든, 제삼자로서 우리가 가타부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가족의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한 계모에 ‘효’를 다하는 것이 과연 이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요?


설연창은 효를 다하지만 그것이 계모의 악행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계모가 설연창의 처와 그의 자녀들까지도 못살게 군다는 것이지요.


자, 이러한 상황에서 설연창은 어떠한 선택을 할까요? 혹은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계모와 절연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기 처와 자녀들을 모른 채 해야 할까요?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도덕성이 부족한 계모가 싫지만, 그래도 아들로서 도리는 다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가도, 그 어머니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생스러운 자기 딸과 아들을 생각하면, 아버지로서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생각도 분명히 들겁니다. 역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설씨 가족들이 놓인 이러한 문제 상황을, <임씨삼대록>은 어떻게 해결하게 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연속하여 다뤄보겠습니다.








글 송혜란

우연한 계기로 고전소설에 붙잡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없다. 석사와 박사 모두 국문장편소설의 하위 장르인 삼대록계 소설로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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