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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 Jul 09. 2021

불안 속에서 고요해지기

일러스트와 회화 사이

감정 변화의 폭이 넓은 편이라 그날의 기분 상태에 따라 하루의 컨디션이 좋을지 나쁠지 결정되는 편이다. 이 감정 기복은 작업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말없이 혼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아 타인의 개입 없이 스스로 헤쳐 나오거나 회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재작년 가을쯤, 작업의 결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우울해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불안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법을 몰랐다.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을 더 극대화시켰던 적이 많았다. 불안한 마음이 지속된다고 하여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것도 아닌데, 그때는 그 감정이 길게 지속되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업을 하던 도중 우울한 마음이 찾아오면,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몸과 마음이 상처 받다가 무기력한 새벽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물론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림을 안 그려보기도 했고, 요가에 좀 더 몰두하면서 스스로 안정을 찾으려는 노력들을 했다.


불안의 이유


이런저런 노력들로 그 시기 이후 그렇게 큰 불안은 없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에 대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을 적어보기로 했다. 작년부터 유화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재료를 적응 중에 있는데, 그 사이 참 많은 고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고민들의 대부분은 현실적인 문제들과 직결됐다. 아크릴을 사용하면 그림의 작업 속도가 빨라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유화를 사용하면서 만만치 않은 재료비와 느린 작업 속도로 인해 일러스트레이터와 회화 작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졌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회화과를 나오지 않았고 전문 지식이 전무후무한 상태라 많은 부분에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전시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막상 다시 작업으로 돌아오면 나는 과연 일러스트레이터인가 회화작가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고민이 시작되었다. 회화 작가라고 하기에는 전시를 제대로 진행한 적도 없었기에 더욱더 의기소침해졌었고 작업의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불안의 근원 알아차리기


사실 불안의 이유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고민이 점점 길어지다 보니 그림 속도가 자꾸 더뎌지는 느낌이 들어 작업 속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함에 시작된 여정이었다. 이 불안한 마음의 시작은 어디일까?부터 생각해봤다. 우선 (1) 작업 속도가 느리다. 가 첫 번째 여정의 시작이었고, (2) 그렇다면 왜 느릴까?라는 질문 속에서 (3) 유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라는 답이 나왔다. 여기에서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4) 유화를 사용하면 회화작가고, 아크릴을 사용하면 일러스트레이터인가? 물론 통상적으로 정해진 정답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5) 그런 길을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렸던가? 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간에 그림이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직업을 구분 짓지 못해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거라면 이 불안은 단순히 내 마음속에서만 존재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불안의 객관화시키기


불안과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엉켜있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나의 질문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시작점으로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면서, 다시 내가 그림을 시작한 이유가 생각났다. 그냥, 좋아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색으로 표현하는 일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불안의 근원을 알아차리고 나니, 불안의 바다 끝까지 들어가는 일들이 없어졌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고민을 하는 시간 대신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거나, 그림을 그렸다. 


silent peace. oil, pastel on canvas 2021


불안 속 고요


불안한 감정을 아예 없앨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좋은 날들을 알아채지 못할 테니깐. 대신 불안한 감정 속에서 고요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불안의 근원을 파악하고, 상태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며 그 안에서 평정심을 갖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힘. 


오늘 작업을 하면서 그 과정을 다시 한번 겪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기분이 안 좋아 불안한 마음이 들다가, 이러다간 불안의 끝으로 도달할 것 같아서 오히려 고민을 줄이고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렸다. 위의 그림은 그렇게 완성이 된 그림이다. 그림이 완성된 후 마음에 고요가 찾아왔고 불안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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