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두목분석

두목, 솔선수범을 해요 좀

by 김독준

어제 오후에 두목(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육하원칙도 없는 짧은 말의 스무고개를 한 끝에 결국 제품을 달라는 것임을 알았다. 내가 하는 일 중에 수문장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나는 두목의 기대(하이패스)를 부숴주었다. 왜냐하면 내게서 물건을 받아가려면 반출을 위한 서류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전화로 물건을 내놓으라 한들, 나 같은 자에겐 통하지 않는다.


뭐 그래도 아예 안 줄 수는 없으니 전화로 실랑이를 좀 했다. 사실 아예 안 줄 생각은 아닌데 기분은 좀 상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절차"를 위반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주요한 명분이었다. 대표건 무엇이건, 주식회사 물건을 반출하려면 규정에 맞춰야지, 왜 전제군주 놀이를 내 앞에서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실소가 나왔으나 계급이 깡패인 건 조선의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서류를 내놓지도 않는 주제에 물건을 달라고 하다니, 서류는 언제 줄 거냐고 했으니 두목은 조금 당황하였다.


일단 그렇게 기분을 좀 상하게 한 다음, 아예 안 주면 소환장이 날아와서 면상을 봐야 할 테니 양보를 해서 일단 가불을 해주기로 했다. 즉 서류받기 전이지만 일단 물건은 주겠다고 한 뒤에, 대신 두목이 데리고 있는 노비들에게 시켜서 서류를 결재해서 내놓을 것을 보장하라고 했다. 그러길래 두목이 노비 중 하나의 이름을 대길래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그때 직접 갔으면 내게 시비를 바로 걸었겠지만 어제 오후에 변경 불가한 선 스케줄이 있었으므로 직접 가지 못했다.


스케줄 끝난 후에 와보니 메일이 와있는데, 나랑 내 직속 상사랑 노비들의 수장이랑 해서 내가 한 것에 대해서 일러바치는 내용을 두목이 보낸 것이었다. 대충 그냥 자기가 달라고 하면 군 말없이 줄 것이지 서류 내놓으라고 해서 삐졌고 자기 생각에는 그게 이상하다며 의견을 달라던데, 어차피 내 직속 상사나 노비들의 수장이나 두목 눈치나 보는 아부꾼들이니 뭐 어느 정도 내가 용인할 수 있는 두목 전용 하이패스를 만든다면 넘어가 줄까 생각하고 있다.


원래는 저 메일 보고 열 받아서 분노의 답장을 쓰다가, "군자는 소인배와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군자는 절대 아니지만, 군자를 지망하는 편이기는 하다 보니 굳이 두목이랑 개싸움을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임시저장만 해놨다. 그냥 절차만 잘 지키면 될 걸 자기만 왜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인지.


집에 와서 대략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집은 결국 가족끼리 닮다 보니 비슷하다.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절차 안 지키면 대표건 신이건 부처건 나한테서 물건 못 받아 간다"라고 하니 가족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한편 왜 나는 두목한테도 져주지를 않는가 하는 생각이 약간 들기는 하는데, 글쎄... 그냥 그냥 내 마음대로 사는 것 같기도 하다.


다년간의 관찰 결과, 내가 다니는 곳에서 가장 절차를 무시하는 자들은 백두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위에 있다 보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학임을 절감한다. 두목의 나라의 문제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절차가 개판인 편인 이유는 최상위자들이 지들 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어제도 결국 손님이 왔다며 다짜고짜 긴급 요구를 한 건데, 회사 대표 정도 되면 그냥 뭐 중국집 전단 돌리듯 누가 현관 앞으로 찾아올 것도 아니고, 선약을 했을 것임에 분명한데도 미리 그런 준비조차 안 해놓고 급하다고 불분명한 전화 한방에 되길 바라다니. 실로 건방지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피곤하게 사는 것 같은데, 강약약강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냥 절차대로 안 하면 대표건 임원이건 윗 직급이건 아래 직급이건 싸늘하게 대하는 걸로 아마 유명할 것이다. 차라리 일관성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방식대로 회사를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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