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입사했을 때, "최고 존엄"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체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곧 잡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답보는 하지 않고, 아주 느리지만 그래도 양적으로나마 전진을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체계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사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체계는 그저 시간이 충분히 지난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자원을 투자해야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현재의 업무를 하는 것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개 이런 경우 현재 해야 하는 업무 수행 만으로도 모든 자원이 투입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선입견이 있다. 사회의 최고 존엄들은 "3명이 해야 할 일을 2명한테 시키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것을 1명에게 시킬까"를 깊게 고민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평범한 회사에서는 단순한 수준의 체계조차도 일은 일대로 하면서 쉽게 만들 수는 없다(평범한 최고 존엄들은 이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업무 수행은 업무 수행이고, 체계 만들기는 체계 만들기다. 새로운 체계를 만든다면(현행보다 개선된 것을 추구할 것이다) 일단 현행 업무에 대해 관찰하고 분석해야 된다. 그것에서 계속 유지할 점과 보완할 점을 찾아낸다.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업무에 도입한다. 그리고 개선 효과가 있는지, 새로운 문제는 없는지 다시 관찰 및 분석을 해야 된다.
복잡한 수준의 체계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단순한 수준이더라도 체계를 바꾼다면 현행 업무에서는 손을 잠시 놓고 체계 만들기에 집중해야 한다. 문제는 체계 만들기는 평범한 회사에서는 이 행동이 절대로 일 하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2보 전진(개선된 체계를 얻는 것)을 위한 1보 후퇴(업무 수행 대신 자원을 소모함)를 하는 것인데, 이 1보 후퇴를 이해하지 못하며 견디지 못하는 최고 존엄이나 상사들이 많다.
회사가 만성적인 빈혈(즉,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 "체계 만들기"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적어진다. 눈앞의 일(대개 일 1인분은 초과하는 상태다)을 해치우는 것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근본적 개선을 위해 지혜를 짜내는 일 같은 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저 가만히 놀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조금 물러서서 검토해 볼 시간이 있다면 간단한 체계 개선 정도는 평범한 회사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정말 바쁘기는 한 것이다.
여기서 인생에 써먹을 수 있는 조언은 무엇일까. 처음 봤을 때 체계가 없는 곳은, 앞으로도 계속 체계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일 머리와 공부 머리의 유사성을 통해 비유해 보겠다.
어떤 책을 공부해야 한다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머리가 좋은 쪽은 무턱대고 책의 첫 페이지부터 암기하며 읽지 않을 것이다. 먼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고, 목차를 훑어보고 핵심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미 아는 부분은 가볍게 훑어보며, 핵심적인 요소에서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시간을 충분히 들일 것이다. 그러면서 시간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두뇌 회전이 좋지 못한 쪽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일단 자신이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모르니 발췌해서 읽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개 목차는 훑어볼 생각도 전혀 하지 않으니 바로 첫 장(챕터)의 첫 문단부터 신중하게 읽기 시작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꿋꿋하게 읽는다. 시간은 많이 들였고 한번 다 읽기는 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는 잘하지 못한다.
보통은 아예 재미없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겠지만, 일과 비유를 하다 보니 포기가 없는 강한 근성을 가진 예시가 되었지만 성과나 효율은 시원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장의 내용을 급하게 머리에 집어넣는 것보다 약간의 시간과 계획을 가진 후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시간과 계획이 체계에 대한 검토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계가 없는 곳에 지성 없이 자신을 던져 넣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저 갈아 먹히기가 좋은 소모품이 된다. 근본적으로 고용된 자의 운명은 냉정하게 생각해도 그냥 소모품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체계가 없으면 몇 번 쓸 수 있는 소모품 수준도 아닌, 거의 1회 용품 수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체계 없는 곳에서는 배울 수 있는 것도 사실상 없다. 눈앞의 일을 하느라 모든 자원을 다 써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눈앞의 일은 어차피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지 개인의 역량 발전과 경력 관리에는 독립적인 부분이다. 즉 운이 아주 좋다면 그 눈앞의 일만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보통은 다른 곳에 써먹을 수도 없을 물 경력이 된다.
우울하지만 결론을 긍정적으로 내보자면, 일단 체계가 없는 곳은 과감하게 거르는 것이 좋다. 차선책으로 이미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면 내가 전에 적은 것처럼 "회사 적응 후에 바로 시작해야 하는 것"에 준하여 힘들게 우리의 시간과 교환한 금전을 자원으로 해서 소양을 발전시키는 것에 투자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지 않으면 더 큰 고난이 반드시 찾아오니 누구나 "그 운명의 날"을 철저히 대비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