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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현 Dec 24. 2018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여행

#베트남일기 6. 사파, 베트남 소수 민족이 사는 곳


일단 여긴 사파


새벽 다섯 시, 아직도 열차 안. 누군가가 각 침대칸의 문을 두드리며 "굿모닝"하고 깨우길래 드디어 도착한 건가 싶어 주섬주섬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커피 마실래?" 하며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다. 아, 이 새벽에 일어나서 커피를 사 마시라고? 원래도 마시지 않았지만 커피가 더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물리치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똑똑똑 문을 두드리더니 "굿모닝 커피?"란다. 안 마셔, 안 마신다고. 안 그래도 열차 안이 추워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이리저리 뒤척이느라 겨우 잠들었는데 정말 화가 났다. 커피를 파는 사람들이 사라지니 이번에는 이상한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가 공짜로 탄 것도 아니고 비싼 돈 주고 탄 건데 새벽부터 이러지는 맙시다 거참.


다시 잠들려는 찰나 라오까이에 도착했단다. 오 타이밍 한번 죽여주네.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하노이에서 사파까지 한 번에 도착하지만 우리처럼 심야 열차를 탔을 경우에는 라오까이 기차역 앞에서 다시 버스를 잡아타고 사파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시작된 지옥의 호객행위. 그들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고 있으니 끈질기게 호객행위를 해와 다시 기차역으로 피신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기차역 밖으로 나가서 5분 정도만 걸으면 버스 정류장이 나온단다.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와 우리가 타려던 02번 버스를 찾기도 전에 사파행 미니버스를 만났다. 큰 배낭을 메고 두리번거리는 우리를 보고 미니버스 기사가 사파에 가냐며 이 버스를 타면 된다길래 바로 탔다.

그냥 좀 더 걸어서 02번 버스 찾아 탈 걸…. 넓고 쾌적하다고 했던, 주로 여행자들이 타는 것 같았던 02번 버스와 달리 미니버스는 현지인들의 리얼 현지 이동 수단이었다. 달린다 싶으면 멈춰서 사람 태우기를 반복, 현지인들이 끝없이 밀고 들어와 좌석과 좌석 사이 버스 바닥에도 막 앉는다. 뭐 이건 내가 바닥에 앉는 게 아니니 참을 수 있지만, 의자 양옆에도 앞에도 손잡이가 없어서 한 시간 넘에 온몸에 힘을 주고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가야 했다. 기차에서도 편히 자지 못해 피곤한데 버스에서마저도 불편하게 있어야 하다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길도 한없이 구불거려서 솔직히 이제는 여행의 즐거움도, 설렘도 없고 그저 짜증만 가득했다.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사파에 도착했다. 사파라고 해서 내리긴 했는데 안개가 자욱해 여기가 어딘가 싶었다. 달리는 버스 밖으로도 보이는 건 안개뿐이라 유령 버스를 탄 기분이었는데, 도착한 사파에서도 몇몇의 소수민족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어 정말 유령도시인가 했다. 안개에 비까지 내려 우리에게 몰려드는 그들을 제치고 눈앞에 보이는 건물 밑으로 피신했다. (알고보니 사파 성당이란다.) 피신한 그곳에서도 소수민족 아이가 인형을 들고 우물쭈물했다. 하마터면 살 뻔했지만 일단 너무 피곤해 가방에서 돈을 꺼낼 여유도 없었고, 추워서 숙소를 찾는데 급급했다.



사파에서의 우리 숙소는 <CAT CAT VIEW>. 지도에 CAT CAT을 검색하니 <CAT CAT HOTEL>이 나와 그곳으로 좌표를 찍고 이동했다. 조금씩 내리는 비를 뚫고 내리막길로 걸었다. 가까스로 호텔에 도착했더니 예약자에 내 이름이 없단다. 깜짝 놀라 바우처를 어내 보여주니 내가 예약한 곳은 CAT CAT VIEW인데 여긴 CAT CAT이란다. 다행히 조금만 더 내려가면 CAT CAT VIEW가 나올 거라기에 미안하다 사과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말 그곳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자마자 우리의 호텔이 나왔다. 드디어 도착했어! 혹시 이른 체크인이 가능하냐 하니 일찍 체크인해줄 테니 체크아웃도 그만큼 빨리 하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뭔들 싫겠어.


짐을 풀고 잠깐 밖으로 나와보았다. 이 호텔로 예약한 이유가 호텔에서 보는 풍경이 끝내준다는 후기를 봐서인데 역시 안개가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안개가 걷히면 끝내주는 사파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방으로 들어오니 "사파는 하노이와 비교가 안되게 너무 춥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호텔 방도 마찬가지로 추웠는데 그래도 침대마다 전기장판이 깔려있고 저녁에는 장작을 넣어 난로도 켜준다니 괜찮겠지. (다만 난로는 첫 장작만 무료고 그 이후에는 돈을 내야 리필해준다 했다.) 지금은 오전 8시. 일단 나는 조금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로 했다. 하노이에서 그나마 맛있게 먹었던 것들이 전부 패스트푸드였던지라 이번에도 로컬 음식을 피해 골랐다. 고르고 골라 들어간 레스토랑. 호텔에서 운영하는 곳인 듯했는데 아마도 사파에서 가장 큰 건물이지 싶다. 나는 파스타를, M은 쌀국수를 시켰는데 둘 다 맛없었다. 입맛이 달라도 엄청 다른 우리 둘이건만 둘 모두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니 이거 정말 문제 있어.



배가 차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감기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먹은 음식도 형편없었지만 굶는 것보단 나으니까.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다. 사진은 열심히 보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내 바로 앞이 아니고서는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런 안개는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 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움직인다. 사파에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단다. 우리는 그중 몽족이 살고 있다는 캣캣 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캣캣마을에서 하루 이틀 가량 묵는 일정도 있었으나 몸 상태가 따라줄 것 같지 않아 그냥 가볍게 갔다 오는 것으로. 구글 지도를 켜고 걷기는 했지만 길이 하나라 다른 곳으로 셀 염려가 없어 나중에는 끄고 움직였다. 어차피 안개 때문에 다른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



안녕, 여기는 캣캣마을


한참을 안갯속을 걷다 보니 어느덧 캣캣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안개라면 사진에서 보던 푸르른 계단식 논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운치는 있을 것 같아.



캣캣마을의 입구. 입구에서부터 기념품을 판다. 자고로 여행지의 기념품이란 입구가 가장 비싼 법. 이곳은 캣캣마을은 전부 둘러본 후 둘러보기로 했다. 딱히 뭔가를 살 것 같지는 않지만.



캣캣마을 곳곳에는 이렇게 염색된 천에 수를 놓고 있는 몽족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몽족의 전통인지 아니면 소수민족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가는 수단인지 모르겠다. 둘다려나.




캣캣마을에 들어섰을 때부터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 멀리까지는 분간이 되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어디야! 날씨 탓인지 계절 탓인지 푸른 논은 아니었지만 논을 보기는 보았다. 아무래도 계절을 잘못 고른 것 같지만.



논을 본 순간부터 사진을 엄청 찍었는데 그때부터 우리 근처를 서성이던 아이들.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며 흔쾌히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이 아이들을 계속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던 아이들.


역시 수를 놓고 있다.


우리를 비롯한 몇 명의 여행자들과 아이들, 오토바이, 때로는 개와 돼지, 닭 그리고 오리와 함께 걸으며 캣캣마을을 돌았다.




캣캣마을에서도 지도는 켜지 않았다. 여기저기 작은 갈래길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걷는 길은 그나마 넓게 난 길 하나뿐.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캣캣마을 중심에 다다랐다. (중심부가 맞으려나.) 캣캣마을 여행기에 무조건 등장하는 커다란 물레방아가 보였다. 공사 중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다 완성된 듯싶어 타이밍 잘 맞춰 왔구나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이곳뿐 아니라 캣캣마을과 사파 시내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사파는 공사 중'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저 멀리 아까 보았던 아이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아이들.


산책하듯 슬렁슬렁 걷다 보니 마을의 끝이었다. 사실 마을이 끝난 줄 모르고 있었다. 길이 끝난 지점에 다리가 하나 있길래 그 다리를 건너갔더니 오토바이 부대가 우리를 싣고 사파 시내까지 데려다주려고 대기하고 있길래 우리가 캣캣마을을 모두 둘러보았단 것을 알았다. 캣캣마을은 사파 시내에서 한참을 내려와야 있기 때문에 돌아가려면 또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길의 연속인 것을 알아서인지 다른 여행자들이 오토바이에 속속들이 올라탔다. 우리는 고민하다 오토바이 부대를 지나쳤다. 걷는 게 좋아.



오토바이 부대를 지나치고 후회를 하긴 했다. 힘든데 그냥 오토바이 타고 편하게 갈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가 사파에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어. 이왕 오토바이도 보내버린 거 큰길이 아닌 샛길로 빠져보기로 했다. 오토바이는 갈 수 없는 길로 가보자. 그리고 그 덕에 캣캣마을내 작은 학교를 만났다. 두동 정도 이어져있는 아주 작은 학교였는데 아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놀고 있었다. 어찌나 신나 보이 던 지 덩달아 나도 신이나 힘든 것도 잊었다.




돌아오는 길에 호텔 근처에 있는 버거집에 들어갔다. 더 이상 로컬 음식으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치킨버거와 비프버거를 시켰는데 결과는 대성공. 다행이야, 맛있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여행


호텔로 돌아와 몸을 녹이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져서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다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아침보다 더 심해져서 내 앞에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장으로 길을 나섰다. 이 안갯속에서는 현지인들도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지 바쁘게 길을 오가는 사람들 말고는 광장이 텅 비어있었다. 이 이상 둘러보는 건 포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이 가져다준 장작으로 불을 피웠다. 직원들이 장작을 가져다주며 불을 피워줄 줄 알았으나 그들은 장작을 전해주기만 하고 돌아갔다. 불을 우리가 피워야 하구나. 불 피우는 게 뭐 어렵겠어하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 불씨 하나 살리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거진 한 시간은 장작에 힘을 쏟아부었나 보다. 가지고 있는 종이들을 다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장작더미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만 하면 당연히 나무에 불이 옮겨 붙을 줄 알았지만 옮겨 붙기는커녕 종이에 붙어있던 불마저 꺼지기 일쑤. 온갖 것들을 다 가져와 부채질을 하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결과적으로 불 피우는 데 성공해서 장작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태우긴 했다. 다만 우리가 불을 너무 바깥에서 피우는 바람에 연기가 전부 방으로 퍼져 그 연기를 우리가 마셔야 했지만. 그래서 급하게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더니 벌레들이 미친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환기도 실패. 장작을 다급하게 안쪽으로 밀어 넣었더니 조금 나아졌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흘러간다. 내일은 제발 안개가 걷혀있기를.


2017년 1월 16일

캐논 EOS 55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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