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현 Dec 27. 2018

안녕, 사파

#베트남일기 7. 해가 뜨지 않는 곳



꿈을 꿨다. 자다 깨서 먼저 일어난 M에게 지금은 안개 없이 맑은 날씨냐 물었고, M은 그렇다고 했다. 그 말에 침대에 누워 밖을 보았다. 꿈에서 본 사파는 안개 하나 없이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보여주었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해 두어 번 더 하늘이 맑냐며 물어보고 결국 일어나 창을 열고 직접 확인도 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잠결에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사파는 오늘도 우리에게 맑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젯밤 잠들기 전 오늘 날이 맑다면 캣캣마을에 한번 더 가보자고 말을 했건만. 이렇게 된 거 오늘은 함롱산만 갔다 공항으로 갈 것이니 체크아웃 시간까지 푹 자기로 했다.


시간을 꽉 채우고 나와 조식을 먹으러 가니 시간이 시간인만큼 우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 테이블만 차있었다. 조식은 메뉴 중 가장 무난한 오믈렛과 빵 그리고 잼과 버터, 계절 과일 음료를 시켰다. 오믈렛에서는 다행히도 베트남의 맛이 전혀 나지 않았고 음료도 바나나를 듬뿍 갈아 넣어 맛있었다. 배는 부르지 않았지만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어째 어제보다 안개가 더 심해진 것 같다. 다시 꿈속으로 돌아갈래!



사파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는 함롱산


사파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함롱산에 올라가면 사파 호수를 비롯, 사파 시내가 한눈에 보인단다. 함롱산 전망대에 올라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그림 같은 마을 전경이 보였다. 기대했던 캣캣마을은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함롱산에서는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놈의 안개가 가시질 않네. 올라가 봤자 호수는커녕 바로 아래도 안 보일 것 같지만 그래도 올라갔다.

그리고 펼쳐진 영화 사일런트힐의 모습.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내 기억 속 스틸컷이나 포스터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내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듯 먼저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위에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안 보여요. 영화 사일런트힐 같지 않아요?"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날씨에 북한산도 아닌 베트남의 한 인공산에서 한국인을 만나다니 신기하다. 한국인들은 정말 참 등산을 좋아한다니까. 아무튼 그들이 올라가도 헛수고라며 넉살 좋게 계속 말을 걸었으나 우린 꿋꿋하게 올라갔다. 내 눈으로 확인할 거야.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올라가는 길에서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으니. 그러나 사파의 날씨는 변덕스럽다고 했고 어제 그토록 기도를 했으니 우리가 전망대에 다다랐을 때쯤엔 안개가 가시지 않을까란 기대도 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기대어 계속 올랐다. (심지어 표지판도 잘 안 보여서 몇 번은 잘못된 길로 오르기까지 했다.) 



전망대 도착. 전망대에서 호수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으로 내려다보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먼저 와있던 다른 여행자가 내 심정을 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십여분을 기다려보았으나 끝끝내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더 기다리려다 겨우 포기하고 산을 내려오는데 잠깐 날이 개는듯해 서둘러 뒤돌아 올라가려 했으나, M이 단호하게 "가봤자 못 봐요. 안개 안 사라져."라고. 맞아, 사파는 우리에게 절대 해를 보여주지 않을 거야.



내 모든 여행 통틀어 베트남 여행은 정말 매력이 없었다. 이는 M도 동의한 부분으로 둘 다 베트남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진 데다 다시는 안 와도 되겠다는 마음까지 있었다. 그러나 사파에 와서 사파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으니 이건 또 이거대로 아쉬웠다. 어쩌면 우리의 하노이행은 사파를 위했던 것이 아닐까. 비행기만 타면 올 수 있는 게 아니라 공항에서도 한참을 달려서 와야 하기 때문에 더 크게 남는 아쉬움. 근처 다른 나라에서 사파행 직행 버스가 있었던듯한데 그때 꼭 사파도 끼워 넣어야지. 소수민족 마을에서 홈스테이도 해보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환경에 덜 예민해져야겠지.


산에서 내려오니 군고구마 등을 굽는 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해가 뜨지 않는 곳


함롱산에서 내려와 사파 호수 주변을 돌면서도 곧 해가 뜨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그래도 이 나름의 운치가 있어 좋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너무 아쉬웠다. 이쯤 되면 사파가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해서 해가 뜨지 않는 게 아니냐는 헛소리까지 나왔다. 아니야 그럴싸해. 내가 사파에 다시 오기 전까지 사파는 내게 해가 뜨지 않는 곳이다.



호수 근처에 학교가 있었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는 학교를 한 번도 못 봤는데 수도에서 벗어난 이곳 사파에서만 벌써 두 번이나 학교를 봤다. 학교에서 나온 아이들이 우다다 뛰어가길래 어딜 저리 급히 가나 봤더니, 우리나라 약수터나 아파트 단지에 있을법한 운동기구가 있는 곳이었다. 여기가 놀이터 대신인가 보다.



호수 주변을 더 돌아봤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라서 조금 걷다 말았다. 걷던 길을 되돌아오다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녀를 보았다. 이 식당 저 식당 가리키며 걷는 걸 보니 점심 먹을 식당을 찾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스레 엄마 생각이 나며 뭉클해졌다. 하마터면 울뻔했네.




어제저녁, 잠시 광장에 나왔다 들어간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아이에게 기념품을 샀다. 작은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였는데 당연히 몽족이나 다른 소수민족의 모습인 줄 알았다. 늦은 시간에 어두운 길 한가운데서 아이 혼자가 팔고 있길래 겸사겸사 샀는데 나중에 다른 동남아 국가들을 여행하며 똑같은 열쇠고리를 보았을 때의 허무함이란. 아무튼 그 아이에게 열쇠고리를 사니 어디에 있던 건지 다른 아이들이 내게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다지 예쁜 열쇠고리도 아니었고 기념 삼아 서너 개 산 건데 다들 내게 똑같은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그중엔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아이도 여럿 있었다. 미안해, 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슬슬 배가 고파졌다. 트립어드바이저 표시가 붙어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었다. 그렇다. 우린 사파에서 단 한 끼도 로컬 음식을 먹지 않았다. 하노이에서 충분히 먹고 충분히 물렸다. 전부 다 맛없었고. 이곳의 스테이크와 파스타 또한 우리가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으나 하노이에서 먹은 것들에 비하면 천상의 맛이었다.



사파에서는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아니 할 게 있었다 하더라도 이 안갯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호텔에서 짐을 찾고 나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버스는 4시에 출발하지만 3시 30분까지 오라는 직원의 말에 충분히 여유를 두고 갔다. 이번에야말로 라오스에서는 타지 못했던 사진 속 그 슬리핑 버스를 기대했는데 그냥 고속버스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우리나라 우등 고속버스랑 같아서 좌석이 넓어 편했다는 것. 2층에 누워 파란 조명과 분홍 조명을 보고 싶었는데 라오스도 그렇고 베트남도 그렇고 정말 그럴싸한 슬리핑 버스랑은 거리가 먼가 보다.

우리가 탄 버스는 사파에서 하노이까지 가는데 우리는 가는 길에 있는 하노이 공항에서 내리기로 했다. 직원에게 몇 번 확인을 했고 공항에 내려준다는 확답을 받았는데 하마터면 못 내릴뻔했다. 표를 내면서 직원에게 한 번 더 "공항에 내려주는 거 맞지?"라고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건만 그 직원이 기사님에게 공항에 세워달라는 말을 안 했단다. 하노이로 가는 중간에 한번 휴게소에 들러 삼십 분가량 휴게 시간을 주는데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M이 직원에게 다시 한번 더 묻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하노이 시내까지 갔을 테지. 나는 벗어놓은 신발을 신기 귀찮아서 그냥 누워있었는데 M은 나같이 귀찮아하지 않고 나갔다 와서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무사히 공항 근처에 다다랐다. 길만 건너면 공항인 곳에 내려주길래 좋은 곳에 내려주네 했는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별수 없이 한 사람당 7,000동씩 주고 도로를 배회하고 있는 셔틀-이 맞는지도 모르겠다-을 잡아탔다. (이것도 어이없는 게 분명 한 사람당 3,000동가량 불러놓고선 우릴 내려주며 7,000동을 달라 우겼다. 짜증 났지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직원이 다가오길래 무서워 그냥 7,000동을 줘버렸다.) 여행의 마무리가 영 시원찮네. 베트남 여행 자체가 영 아니긴 했다만.




짧은 여담


한국에 도착해 여덟 시쯤 입국 수속을 밟고 나와 맡겨두었던 외투를 찾고 공항 철도를 탔다. 홍대에서 내려 연남동에 사는 P의 집에 들러 씻고 옷만 갈아입고 출근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하는 출근이라 그런지 주말 뒤 월요일보다 더 회사에 가기 싫었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내가 또 여행을 가지.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일보다 내 배고픈 게 먼저라 C가 준 도시락으로 아침부터 먹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 점심은 한국식 백반이 너무 먹고 싶어서 지금은 없어진 <엄마 주방>에 갔다. 중간중간 다른 반찬도 집어먹긴 했지만 거진 김치만 거의 먹었다. 역시 나는 쌀밥과 김치가 없으면 살 수 없어. 특히 하노이처럼 음식이 맛없는 곳을 다녀와서는 김치로 입가심을 해줘야 한다. (하노이 음식이 맛없다는 것은 나와 M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밝힌다.) 쌀밥을 먹으니 이제야 한국에 돌아온 것 같다. 내 입과 위장 수고했다!


2017년 1월 17일

캐논 EOS 550D




여행일기 #베트남, 하노이 편 연재 종료

매거진의 이전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