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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현 Feb 10. 2019

나 홀로 아유타야

#방콕일기 6. 혼자 하는 여행으로 얻는 깨달음



오늘은 아유타야에 가기로 했다. P와 함께했던 지난 여행에서 기대보다 실망이 컸던 아유타야지만, 다시 한번 가보기로 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한 장소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바뀌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한번 실망한 곳에 또다시 기대를 갖는 것이 조금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왜인지 아유타야를 '실망스러운 곳'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던 때의 기상 시간에 일어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9시에 일어났다. 사실 울리는 알람을 계속 늦추며 더 잤다. 어제 자기 전 블로그를 찾아보니 방콕에서 열두 시쯤 출발한 사람도 몇 있었고, 가봤던 곳이라 마음을 놓기는 했다. 그래도 오늘은 조식을 먹었다. 날이 좋아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시작이 좋다.

아유타야의 복장 규정이 조금 더 엄격하게 바뀌었다기에 일단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아유타야에 가서 위에 덧입을 코끼리 바지와 얇은 가디건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햇빛을 가릴 모자까지 챙기니 짐이 많아져 평소에 들고 다니던 여행용 작은 가방을 넣어두고 큰 가방을 꺼내 들었다.



출발이 다소 늦어 조금 급하게 움직였는데 막상 기차표를 발권하고 나니 지난 여행과 고작 20분밖에 차이가 안 난다. 거기다 나보다 먼저 와서 미리 대기라고 있는 기차라니. 이번에도 아유타야에 갈 때는 3등급 기차를, 돌아올 때는 1등급 기차를 타고 싶었는데 타이밍 좋게 3등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이번 아유타야 여행은 운이 따른다.





다시 또 아유타야


이따금 사진을 찍고 대부분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아유타야 기차역에 도착했다. 체감상 기차를 타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아유타야에 도착한 것도 모르고, 기차 안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내릴 준비를 하길래 "여긴 또 무슨 관광지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밖을 보니 익숙한 풍경이길래 헐레벌떡 따라 내렸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호객행위를 하는 툭툭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바로 길을 건너 수상 보트를 탔다. 기차역에서 아유타야로 넘어갈 때는 돈을 먼저 내고 보트에 타고, 반대로 아유타야에서 기차역으로 돌아올 때는 보트를 탄 뒤 기차역에 도착해서 돈을 낸다.



아유타야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전거 대여. 오늘 하루를 책임질 자전거라 꼼꼼하게 골랐다. 50바트의 행복. 지도를 받아 들고 드디어 출발!





01. 왓 마하탓


아유타야에서 가장 유명한 '보리수나무 불상'이 있는 <왓 마하탓>. 이곳에서 표를 살 때 복장이 걸렸다. 민소매도, 짧은 반바지도 모두 안된단다. 표만 사고 옷 제대로 갖춰 입고 들어가려 했는데. 가방에서 가디건과 코끼리 바지를 꺼내 직원에게 보여주자 씩 웃는다.


"나 준비 제대로 하고 왔어!"


사원에 들어서기도 전에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인고 하니 아이들이 한 무더기 있다. 옷을 맞춰 입은 걸 보니 유치원생, 많이 봐줘야 초등학교 저학년인 듯하다. 왓 마하탓을 둘러보는 내내 시끄럽겠지만 왠지 나쁘지 않았다.




단체 사진과 독사진을 찍는 아이들 뒤에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 보리수나무 불상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왓 마하탓을 정말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무너진 벽도 한번 쓰다듬어 보고, 계단에 앉아도 보고. 그러다 문득 방콕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급하게 홈페이지에 들어가 시간표를 확인했다. 정확한 시간을 확인했음에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아 넉넉하게 다섯 시쯤 기차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동행자가 있었다면 둘 중 하나는 기차역에서 시간표를 봐야 한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르는데.





02. 왓 라차부라나


<왓 마하탓> 옆에 있는 <왓 라차부라나>. 자전거를 타면 2-3분 남짓 걸린다. 왓 라차부라나는 아유타야 7대 왕과 그 동생의 화장터 위에 만들어진 사원으로 보물이 꽤나 묻혀있다고 한다. 현재도 묻혀있는 건지, 아니면 묻혀있었단 과거형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보물이 묻혀있다는 것치곤 왓 마하탓에 비해 규모가 작다.



규모가 작다 보니 다른 사원들에 비해 볼거리도 많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원이다. 사원에 올라 작게 뚫린 창밖으로 바라보는 이 모습 때문에. 누군가가 창밖을 바라보는 그 뒷모습도 좋고, 내가 직접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곳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내부를 전부 둘러볼 수 있는 좁은 곳에서 한참 밖을 구경했다.






03. 왓 프라시산펫


<왓 프라시산펫>은 아유타야의 사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사원으로 왕실의 전용 사원이었다고 한다. 미얀마군의 침략 당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사원 가운데 있는 파고다 3기는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었다. 이 파고다* 안에는 역대 왕 가운데 3명의 유골, 의복, 불상 등을 넣은 상자가 묻혀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파고다의 앞을 보고 가지만, 나는 파고다의 앞보다 뒤가 더 좋다. 일단 사람이 적어 한적하다. 그리고 나뭇가지들이 늘어져있어 비교적 빛도 많이 들지 않아 선선하다. 파고다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머리 바로 위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나무를 오르내리는 청설모-였나 다람쥐였나-도 보이고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새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파고다: 서양에서 동양의 불탑 佛塔을 이르는 말로, 포르투갈어 pagode에서 유래






04. 왓 로까이쑤타람


이번 아유타야 자전거 여행도 지난 여행과 같은 코스로 돌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목적지는 역시 <왓 로까이쑤타람>. 거대한 와불상이 있는 곳이다. 앞선 사원들과는 조금 동떨어진 곳에 있는 곳이라 자전거를 타고 힘껏 달릴 수 있다. 신나게 달려 전에 보았던 학교도 지나치고, 시장도 지나쳤다.



인자한 미소를 띤 거대한 와불상. 평소에는 여행자들로 바글바글한데 운이 좋게도 인적이 드물 때 도착했다. 사진을 원 없이 찍고 잠시 쉴 겸 돌 위에 걸터앉자마자 일본의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역시 이번 여행은 운이 좋다니까!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쥐포 냄새가 났다. 홀린 듯 냄새를 따라가 보니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오징어를 구워서 팔고 있었다. 이 정도 냄새면 분명 맛있을 테니 또 먹어줘야지.



제일 작은 10바트짜리 두 마리를 골랐더니 그 자리에서 오징어를 얇게 펴고 구워주었다.



다시 불상 앞으로 돌아와 소스에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울리는 상투스! 소스가 진짜 맛있었다. 우와, 이거 대체 뭐로 만든 거지?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두 마리를 다 먹고 다섯 마리를 더 샀다. 아껴두었다가 호텔로 돌아가 먹어야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왔던 길을 부지런히 되돌아갔다. 서서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수상보트를 타고 기차역으로.



다섯 시에 기차역으로 돌아와야지 하긴 했지만 시간을 딱 맞추려 한 건 아닌데 역에 도착해 표를 사고 보니 5시 3분. 6시 6분에 출발하는 에어컨 달린 1등급 기차표를 샀다. 방콕으로 떠나는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표이기도 했다.



표를 사고 역에서 되돌아 나와 그간 기차역과 아유타야를 오가며 봐 두었던 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팟타이와 맥주를 주문했다. 팟타이는 정말로 무난했다. 태국에 와서 많은 팟타이를 먹어보진 못했지만 뭔가 가장 보편적인 맛이 아닐까. 팁싸마이 옆집에서 팔던 것이 훨씬 맛있다.




6시 6분 기차지만 26분에 탑승했다. 이 정도면 선방했다. 지난번과 달리 사람들로 가득했던 기차. 심지어 내 자리에는 어떤 아이가 누워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는 사람의 아이인가 보다. 내 자리라 말을 하고 어찌어찌 자리에 앉긴 했으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아이도 불편한지 자꾸 발을 뻗어 아이의 신발이 나를 때렸다. 그럼 표를 두 장 사면 되잖아. 처음 몇 번은 가만있었으나 발길질이 점점 심해져 아이의 엄마에게 눈치를 주었다. 우리 같은 돈 냈잖아요, 나도 좀 편하게 갑시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는데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지난 여행에서 그리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아유타야의 노을이다. 기차 안에서나마 보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아쉬움이 컸다. 사원에서 보고 싶었는데. 노을을 보며 오늘을 돌이켜보니 지난 여행에서는 분명 실망했던 아유타야가 이번 여행을 통해 좋아졌다. 이곳을 실망스러운 곳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 떠나온 내 목적이 성공한 것이다. 엄청 더운 하루였는데도 그냥 좋았다.

사실 인스타그램이나 책, 인터넷에서 혼자 여행을 하며 많은 것을 깨닫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 나도 은연중에 기대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홀로 여행하는 기간이 짧아서 일수도 있고 뭔가 생각에 빠지기 전에 사진 찍는다고 쑥 하고 생각에서 빠져나와서 일수도 있고. 그러다 아유타야 어딘가에 앉아서 한 생각이 '꼭 뭔가를 얻을 필요는 없지 않나?'였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그거로 된 거지. 어, 나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쌀밥과 김치, 콜라를 샀다. 아유타야에서 팟타이를 먹고 왔기에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냥 김치가 먹고 싶었다. 냉장고에 맥주도 한가득이었지만 그냥 콜라도 마시고 싶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이 마른 것을 확인한 후 바로 수영장으로 올라가 수영을 했다. 아유타야의 더위가 싹 가신 대신 피로가 조금 더 누적되었다. 아무튼 씻고 나와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김치와 아유타야에서 산 오징어를 꺼냈다. 여기에 시원한 콜라 한 모금. 조금 전까지 쌓인 피로가 싹 가신다!


2018년 7월 26일

캐논 EOS 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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