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일기 5. 방콕의 가장 아름다운 새벽 사원, 왓 아룬
이름도 찬란한
'새벽 사원'
방금 보트에 탔는데 벌써 <왓 아룬>에 도착했다. 그만큼 왓 포와 왓 아룬은 가까운데, 짜오프라야 강을 끼고 서로 마주한 곳에 위치해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두 사원 사이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실제로 마주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왓 아룬 사원의 야경을 보기 위해 루프탑처럼 높은 곳에 가면 앞으로는 왓 아룬의 야경을, 뒤로는 왓 포의 야경을 볼 수 있다.
왓 아룬은 왓 포 입장료의 반값인데 왓 포의 몇 배로 나를 충족시켜줬다. 왓 포보다 넓지 않은데도 더 많이 보았고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 더운 건 여전했으나 (심지어 날도 더 흐려졌다) 이상하게 더 마음에 들었다. 사실 보트에서 왓 아룬이 보인 그 순간부터 그냥 좋았어.
왓 아룬은 톤부리 왕조 때의 왕실 전용 사원으로, 톤부리는 아유타야 왕조 멸망 후 십여 년간 수도 역할을 했다는 곳이란다. 태국어로 '아룬'이 새벽을 뜻하기에 '새벽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다양한 색의 사기와 자기로 장식되어 있어 이른 아침에는 이들이 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고 한다. 아쉽게도 나는 늦은 오후 그것도 흐린 날 이 새벽 사원을 방문했다.
흐리다 못해 왓 아룬 높은 곳에 있을 때 소나기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나는 이 왓 아룬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비가 싫어 대학생 때는 비가 내리면 자체 휴강까지 했던 나인데도 이 비가 싫지 않았다. 짜오프라야 강 건너로 보이는 흐린 하늘과 왓 포 사원이 이 비를 낭만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강 위의 푸른 배가, 바람에 부대끼는 태국의 국기가 전부 좋았다. 푸른 나무 숲 뒤로 보이는 톤부리의 어느 마을도 너무나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왓 아룬을 꽤 오래, 진득하게 돌아보고 몹시도 아쉬워하며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명당에서 왓 아룬의 야경을 보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예의 그 보트를 타고 다시 왓 포로 돌아왔다.
야경의 정석
왓 포와 짜오프라야 강 사이, 선착장 옆으로 루프탑과 레스토랑이 줄지어 서있다. 그리고 이 곳들이 왓 아룬의 야경을 보기 위한 명당으로 유명한 곳들이다. 이 중 딱히 복장 제한이 없고 (내가 방문할 때만 해도) 다른 곳들에 비해 이름을 덜 날리던 <이글 네스트 바>를 찾았다. 다섯 시 오픈이라기에 네시 반쯤 여유를 두고 방문했는데도 모든 자리가 사람들로 빼곡했다. 이들은 물론 다 한국인들이었다. 역시 블로그의 나라!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는 어디서든 빈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거다. 왓 아룬을 정면으로 보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야외 테라스 어딘가에 딱 한 자리가 비어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왓 아룬을 바라보며 산미구엘 한 병.
그러던 중 또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왓 아룬 안에서 맞던 비와 달리 기분이 나빠 누구보다 빠르게 실내로 들어왔다. 내가 앉은자리가 명당이 아니라 재빨랐던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나보다 조금 더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미적대다가 빗줄기가 세지자 그제사야 엉덩이를 뗐거든. 왓 아룬 정면에 앉은 정말 명당 중의 명당에 앉은 사람들은 비가 오든 말든 제 자리를 지켰다. 그래, 그만큼 왓 아룬 야경이 끝내준다는 거지?
후드득 내리던 빗줄기가 약해졌다. 슬슬 눈치를 보던 나는 이번에도 역시 누구보다 빠르게 야외 테라스로 나가 아까보다 조금 더 좋은 곳에 슬그머니 앉았다. 괜스레 맥주 맛도 더 좋아진 것 같다.
하루 종일 꽁무니를 감췄던 해가 이제 아예 사라지려나보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왓 아룬의 불이 켜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빛을 감춘 하늘. 무슨 말을 더해. 맥주를 한 병 더 시키고 왓 아룬을 보았다. 야경은, 전날 갔던 <딸랏롯파이 2>의 것이 훨씬 좋았다. 보편적인 야경의 모습이 아니었고 그 순간 바람, 공기 등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뒤돌아보면 노랗게 빛나는 왓 아룬이 계속 생각났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태국 야경의 모습은 왓 아룬이었나 보다.
왓 아룬을 충분히 담고 뒤를 돌아 나왔다. 야외 테라스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실내는 한산했다. 계산을 하다 옆을 돌아본 순간 나는 또 감탄했다. 여기 태국 야경이 또 있네. 몇 시간 동안 몇백 장을 보고 찍은 왓 아룬을 단숨에 잊게 만든 왓 포의 야경. 낮에는 내게 그토록 매력 없던 곳이었는데, 밤의 왓 포는 사진 두어 장 정도만 찍을 수 있었던 그 찰나의 순간에 나를 매료시켰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그랩을 켰으나 이번에도 역시 전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나가는 툭툭을 잡아탔다. (아니 다들 잘만 잡힌다는데 난 대체 왜 이래?) 왓 포에서 사판탁신역까지 200바트를 180바트로 딜하고 잡아탔다. 이 돈이면 그랩으로 호텔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나를 태운 기사님이 다짜고짜 내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나 한국인인데. 그런데 내가 중국어로 "나 한국인이야."라고 말을 했더니 왜 중국어를 할 줄 아냔다. 먼저 중국어로 말을 걸었으니까! 사실 엑소가 으르렁으로 활동하기 전 EXO-M, EXO-K로 나눠 활동했을 때 시우민이 중국어를 하면 다른 팬들의 번역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알아듣고 싶어서 짧게나마 중국어 학원을 다녔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할 수는 없어 그냥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했더니 그 이후 계속 말을 걸어 중국어와 영어를 오가며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며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사판탁신역에 도착했다.
이 대화에 정신을 놓고 온 걸까. 이쯤 되면 도착해야 하는데 왜 내가 아는 역이 안 나올까 했더니 BTS를 반대로 탔다. 왜지? 분명히 확인하고 탔는데. 그래도 노선이 짧은 구간이었던 터라 금방 다시 돌아왔다. 아니 그런데 생각할수록 웃기네. 분명히 잘 확인했는데.
어쨌든 그래도 무사히 아속역에 도착해서 터미널21 지하에 있는 고메 마켓으로 갔다. 다가오는 주말에 혼자 여행을 끝내고 HD님이 합류하는데, 야속하게도 그가 오는 딱 그 시기에 태국에서 술을 판매하지 않는단다. 여행의 묘미는 저녁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인데! 그래서 부랴부랴 맥주 8병을 종류별로 다양하게 샀다. 여기에 선물용으로 이것저것 더 담고, 비비고 김치랑 연어롤까지.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내일까지 먹을 요량으로 큰 것을 샀다. 욕심이 과했는지 술에, 장 본 것에, 카메라에 짐이 한 보따리. 평소에는 그리 멀지 않던 호텔 가는 길이 어찌나 멀던지. 여기에 비까지 내려서 짐이 점점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면 모든 짐을 던져버리고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수영장에서 놀까 했건만 아침에 널어놓고 간 수영복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그럼 내일 놀지 뭐. 대신 맛있게 저녁을 먹자. 씻고 나와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김치와 연어롤을 뜯었다. 연어롤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찼으나 김치를 뜯고 보니 보관할 방법이 없어 김치를 다 먹으려고 어제 사둔 컵라면을 뜯었다. 다행히 고수는 들어있지 않아 먹긴 먹었는데 웩, 이거 무슨 맛이냐.
2018년 7월 25일
캐논 EOS 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