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일기 7. 방코키안 뮤지엄 Bangkokian Museum
열 시쯤 조식을 먹었다. 거의 막바지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조식을 먹고 있었다. 다들 느긋하게 여행하는구나. 조식을 먹으며 오늘은 무엇을 할까 하고 계획을 세웠다. 원래는 방끄라짜오에 가서 자전거나 타려 했는데, 오늘은 태국의 휴일이라 여기저기 장사를 안 하는 곳이 꽤 있다길래 다음날로 미뤘다. 한번 가려면 은근히 번거로워서 거기까지 갔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돌아오면 조금 슬플 것 같아. 대신 월/화가 휴무라 미뤄두었던 <방코키안 뮤지엄>에 가기로 했다. 어쩌면 그곳도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렇다면 방콕 어딜 가도 다 문을 닫았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교통편이 애매해 택시를 타려 했지만, 문을 닫았다면 택시를 타고 간 게 아까워질 듯해 MRT를 타고 가서 나머지는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침을 먹는 짧은 시간 동안 나름대로 야무지게 계획을 세웠네.
수쿰빗역까지 가는 길에 지난 여행에서 세탁물을 맡겼던 곳에 또 빨래를 맡겼다. 1kg에 100바트인데 내 빨래는 1.1kg라 110바트, 오늘 저녁에 받고 싶어서 4시간짜리 익스프레스 코스로 부탁했더니 1kg에 200바트가 되어 결과적으로 총 220바트. 다림질까지 해준다.
방코키안 뮤지엄을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택시지만, 위에 썼듯 오늘의 나는 MRT를 타고 움직였다. 후아람퐁역 4번 출구로 나와 구글 지도를 따라 걸었다. 지도에서 분명 고가다리 밑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곳은 차도만 있을 뿐 걸어갈만한 길은 없었다. 방향만 맞으면 되지 뭐, 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방향만 따라갔더니 그래도 제대로 도착했다. 다행히 문도 닫지 않았다. 괜히 쫄았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방콕 중산층의 집
방코키언 뮤지엄은 1937년에 지어진 수라와디 Suravadee 가문의 집을 보존, 개관된 박물관이다. 총 3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방코키언 뮤지엄은 첫 번째 건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른 지역에 위치하여있던 것을, 방콕시에서 기증받아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현재의 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20세기 초 방콕 중산층의 삶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저택인데, 그간 둘러본 방콕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감히 상류층의 저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 집의 안주인은 인도인 의사와 결혼했다 사별 후 중국계 태국인과 재혼하여 이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저택에는 그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가구 및 물품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릇을 비롯하여 작은 빗, 부채까지 그 종류도 꽤 다양했다.
첫 번째 건물은 서양식으로 건축된 가족들의 생활공간이란다. 앞뒤로 커다랗게 문이 뚫려있어 전체적으로 시원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방코키언 뮤지엄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푸른 정원이, 이 커다란 문 덕분에 집안에서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이 저택에서 가장 눈에 띈 부분은 바로 창. 창 역시도 문과 같이 시원시원하게 나있었다. 이 창문을 보고 있으니 「빨강머리 앤」이 사는 초록지붕 집이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 나무로 된 창문을 열며 기지개를 켜는 앤이 눈앞에 그려졌다.
서양 고전 영화에서나 보던 경첩이 달린 옷장과 거울 등도 신기했다. 전체적으로 서양의 느낌이 물씬 났다. 어떤 이의 사진에서는 옷장이 열려있어 안주인의 옷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땐 옷장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아쉬웠다. 이제는 아예 닫아놓는 건지, 아니면 가끔 열어놓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늘 닫혀있지만 관람객이 열어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이 커다란 주택에 나 혼자 있어서 그런가 왜인지 스산하고 무서워져서 금방 내려왔다.
잠시 밖에서 쉬다 만난 고양이. 이곳에서 일하는 분이 고양이의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그새 까먹었네. 너의 이름은 나비가 좋겠다. 성의 없어서 미안해.
두 번째 건물은 안주인의 첫 번째 남편인 인도인 의사 Francis Christian의 진료소로 당시의 의료 도구 등이 전시되어있었는데 3채의 건물 중 가장 개방적이고 밝았음에도 가장 무서워서 후다닥 내려왔다. 사방이 창이라 햇빛이 계속 들어왔는데 왜 무서웠지?
마지막 건물은 아마 창고로 전쟁 이전에 사용하던 여러 집기들, 축사 등이 보존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양한 우표와 지폐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직원이 따라 들어와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의 영어가 짧아 얼마 듣지 못하고 혼자 둘러보겠다고 슬쩍 웃어 보였다.
첫 번째 저택에 전시되지 못한 거의 모든 생활용품이 이곳에 다 있었다. 가족들이 가지고 놀았던 것 같은 체스 말부터 단추, 각종 그릇과 집기들, 상자, 그리고 수영복까지. 정말 그 시대 방콕 중산층의 삶을 그대로 엿보았다. 빈티지 소품을 좋아하거나, 분위기 있는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그냥 방콕 걷기
방코키안 뮤지엄에서 나와 방콕 출발 하루 전 우연히 발견한 <aoon pottery>라는 작업실 겸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오늘은 그랩 프로모션 코드를 이용해 그랩을 불렀다. 어제와 달리 잡히는 것도 금방, 도착도 금방 했다. 그런데, 오, 이럴 수가, 카페가 문을 닫았네! 오늘이 휴일이라서? 알고 보니 화요일, 금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단다. 팁싸마이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아무리 무계획 여행이라지만 왜 난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알아봤을까. 시간이 많으니 그나마 가까운 역인 후아람퐁역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중간에 큰 행사를 하는 사원까지 구경했는데도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한 후아람퐁역. 무엇을 할까 하다 아리역 카페 거리에 가기로 했다. 후아람퐁에서 MRT를 타고 수쿰빗으로, 다시 수쿰빗에서 BTS를 타고 아리로. 조식을 늦게 먹어 배가 별로 고프진 않지만 점심때가 되니 햇빛이 더 강렬해져서 더위를 피할 겸 뭔가 먹어야겠다.
그렇게 해서 고른 식당은 <레이 라오 Lay Lao>. '2018 방콕 미슐랭 가이드'에서 블라블라 뭔가로 선정되기도 하고 블로그에서도 꽤 검색되는 것을 보니 유명한 곳인가 보다. 아리역과 가까워 금방 도착했다. 예전에 몇 번 오가며 보았던 곳인데 맛집이었구나. 애매한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혼자라 빈자리로 바로 안내받았지만. 블로그에서 보았던 밥과 돼지고기 한 접시, 그리고 쏨땀을 시켰다. 고기는 누린내가 조금 났지만 소스와 먹으니 그럭저럭 괜찮았고 쏨땀은 맛있었다. 쏨땀은 맛없을 수가 없어! 시원하니 기분 좋게 거의 다 먹었다.
더위를 식히고 나와 아리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실은 돌아다니다가 지난번 P와 갔었던 아직 미완성의 카페를 다시 한번 더 방문하고 싶었는데 찾을 수 없었다. 이름이라도 적어둘걸. 하다못해 구글 지도에 위치를 찍어놓거나. 나는 내가 다시 오면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오만이었네. 무작정 걷다 보니 다시 더위가 엄습해왔다. 여기저기 카페를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해 아리역 근처의 쇼핑센터에서 카페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나 쇼핑센터에서도 스타벅스 말고는 딱히 카페가 없어 다시 카페 거리로 돌아왔다. 별수 없이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 그나마 하나 봐 두었던 작은 카페로 갔다. 딸기 스무디를 주문하고 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짜뚜짝 시장 말고 공원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움직인다. 아리역은 모칫역과 두정거장 거리로 모칫역에는 방콕에서 가장 유명한 <짜뚜짝 시장>이 있다. 짜뚜짝은 주말에 열리지만 금요일에도 조금이나마 문을 여는 곳이 있고 저녁 6시부터는 야시장도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모칫역으로 가기로 했다. 물론 내 목적은 짜뚜짝 시장보다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짜뚜짝 공원>이지만. 룸피니도 그렇고 짜뚜짝도 그렇고 난 공원이 좋아.
모칫역에서 짜뚜짝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룬다. 언제 가도 늘 떠밀리듯 내려간다. 그 틈에서 벗어나 구석으로 도망가 공원을 바라보니 삼삼오오 모여 쉬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은 나도 잔디밭에 앉아 있어 볼래.
그러나 이 꿈은 금방 산산조각 났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무를 타는 커다란 쥐를 보았다. 방콕에서 몇 번 쥐를 보긴 했지만 이번만큼 소름 끼쳤던 적은 없다. 지금 당장 내가 서있는 곳만 해도 고개를 들면 굵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와있는데 저곳에도 쥐가 있을지 모르잖아. 엊그제 아속역 부근에서 본 두 마리의 쥐가 더 뚱뚱하고 컸지만 지금 본 쥐는 마치 다람쥐인 양 나무까지 타고 슈슈슉 하고 올라가서 더 소름 돋았다. 나도 잔디에 앉아보고 싶었는데!
공원에서 진득하니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짜뚜짝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공원과 시장 사이에 길게 나있는 간이 포장마차에서 쏨땀을 먹겠다는 계획도 있었는데 쥐를 보고 난 뒤라 그런지 입맛도 사라졌다. 시장을 둘러보긴 했으나 정말 주말에 비하면 문을 연 곳도 많지 않았고 이상하게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는 데다가 소나기까지 내려 금방 돌아왔다. 어차피 주말에 다시 올 거니까.
호텔로 들어가기 전 고메 마켓에 또 들렀다. (1,000원도 채 되지 않지만 고급진 느낌의) 나무젓가락 한 봉지와 샐러드를 샀다. 샐러드는 뷔페처럼 내가 내용물을 채우는 건데 엄청 알차게 채웠는데도 한국 돈으로 3,700원 정도밖에 안 했다. 정말 좋아! 한국에서 이 정도면 만원은 넘을 텐데. 음료수를 살까 하다가 냉장고에 채워둔 맥주가 떠올라 그냥 나왔다. 그렇지만 샐러드만으로는 아쉬워 빨래를 찾고 그 근처 노점에서 쏨땀을 샀다.
+ 틴트 오브 블루 이야기
어제 방이 제대로 청소되어 있지 않았었다. 제대로가 아니라 침구 정리 말고는 아무것도 청소된 게 없었다. 그래서 팁과 함께 꼭 청소를 부탁한다는 메모를 적어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대충 방 정리는 되어 있었지만 화장실과 방바닥에 내 머리카락 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분명 메모에 '화장실 청소와 옷걸이 몇 개를 부탁한다'라고 적어뒀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되어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타월도 바디 타월만 있고, 일반 타월도 채워놓지 않았다. 타월을 가지러 간 김에 리셉션에 이 부분에 대해 말했더니 원래 청소는 이틀에 한 번만 해준단다. 하지만 내가 여기 온 게 며칠 전인데 단 한 번도 청소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이해가 안 된다.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은 어매니티도 제대로 안 채워주고. 다른 건 다 마음에 드는데 청결 부분과 직원 대응은 불만족!
2018년 7월 27일
캐논 EOS 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