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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현 Feb 15. 2019

방콕에서 보낸 오늘 하루는

#방콕일기 8. 방콕에서 만난 모든 것



그래도 이제 혼자가 아니야


국내는 홀로 잘도 돌아다녔지만 해외를 혼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된 퇴사도 처음이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제는 흔치 않은 '내 인생 첫 ○○' 중 두 가지나 방콕과 함께하고 있다. 퇴사 후 그것을 기념하는 여행인 만큼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니면 여느 여행기 속 여행자처럼 깊은 깨달음을 얻기를 기대했다.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뉘우침 혹은 앞으로의 다짐 같은 것이라도. 그러나 나는 깨달음도 뉘우침도 또 다짐도 얻지 못했다. 아유타야에서 돌아오는 길에 '꼭 뭔가를 얻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그거로 된 거지.'로 깨달음을 얻은 척을 했으나 내가 원한 류의 깨달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홀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게 되었다. 영어는 짧지만 외국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아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어도 두렵지 않았고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 길을 잃어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낯선 상황 속의 내가 익숙해졌다. 일단은 이거면 되었다.


아무튼 이런 나에게 오늘부터 동행자가 생겼다. 퇴사를 앞두고 방콕행 티켓을 끊은 뒤 HD님에게 "오실래요?"라고 물었고 그는 흔쾌히 "가겠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여행의 중간보다 조금 더 지난 금요일 저녁, HD님이 방콕에 도착했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함께 하는 여행이라 해도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틴트 오브 블루의 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를 방콕으로 초대하기는 했지만, 방콕에서 새로이 할 것은 없었다. 그냥 발길 따라 걷는 것뿐. 어제 갔던 데를 갈 수도 있고, 엊그제 갔던 데를 갈 수도 있으며 아니면 전혀 걷지 않았던 곳을 갈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하는 첫 방문지는 어제도, 그리고 이전에도 갔던 <짜뚜짝 시장>. 어제와는 달리 사방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칫역은 물론이고 시장 안에도 사람들로 북적여서 그들에게 밀려 움직여야 했다. 짜뚜짝 공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제도 많긴 했으나 오늘은 어제의 두배는 되었다. 여유로운 공원의 느낌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푸르고 좋았다. 어제 그 쥐의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질 못해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짜뚜짝, 어디까지 가봤니?


시장 초입부의 노점에서 땡모반(수박주스)부터 벌컥벌컥 사 마셨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땡모반으로 하루에 두세 번씩 땡모반을 찾던 이전과는 달랐다. 출발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땡모반 노래를 불렀으면서 왜? 땡모반이 좋아 땡모반에 대한 짧은 글도 따로 썼을 정도면서 왜?


빠에야는 먹지 않아도 이 아저씨는 봐야 비로소 짜뚜짝에 온 것 같다.


이번에는 돈을 많이 쓰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다 보니 금세 양손에 봉투가 그득하다. 가장 먼저 산 것은 P의 라탄 슬리퍼. 지난 여행에서 P와 각자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라탄 슬리퍼를 사서 신고 다녔는데, 비 오는 방콕을 한번 뛰어다녔다고 그의 슬리퍼가 아작 났다. 그래서 그때와 같은 슬리퍼를 꼭 사다주기로 약속했으나 워낙 복잡한 짜뚜짝이라 그때 그 슬리퍼 가게를 찾을 수 없었다. 별 수 없다며 포기하던 찰나 정말 거짓말 같이 내 앞에 나타난 그 가게! 신이 나서 내 슬리퍼도 하나 더 사고 P의 것도 샀다. 하필 P가 원하던 색의 슬리퍼는 그의 사이즈만 똑 떨어져서 다른 색으로 사야 했지만 그것도 예쁘니까 괜찮다. 슬리퍼를 사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눈에 들어오는 족족 사기 바빴다.



짜뚜짝 시장 안에서도 늘 가던 구역만 가다가 이번에는 새로운 곳들을 가보았다. 짜뚜짝 공원과 가까운 쪽에 있는 곳은 신진 작가들의 무대인 듯했다.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딱 어울릴 카페들이 있는가 하면, 여행자들이 맥주병을 들고 앉아있는 야외 펍이 있기도 했고, 또 그 옆에서는 자신의 색이 뚜렷한 그림이나 작품을 파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했는데 물어보나 마나 내 주머니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가격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쉽네.



그리고 짜뚜짝 시장 안쪽에는 더 다양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조명만 파는 골목이 있는가 하면, 가구만 파는 골목도 있고, 또 먹자골목처럼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이 있었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는 신기한 가게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해리포터 컨셉의 가게에는 신비한 동물사전의 주인공이나 진배없는 니플러도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영화와 똑같았다. 다음에는 안에 들어가서 구경해봐야지.



아, 더 안쪽에 있는 골목은 오픈형 펫샵 같았다. 어느 골목에는 말라뮤트였나 시베리안 허스키 새끼만 수십 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 골목에는 뱀과 도마뱀 등 파충류만 있었으며 그 옆 골목은 고양이만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다양한 종의 펫샵으로 가득했다. 새끼 원숭이를 보고 귀여워서 나도 사진을 찍긴 했지만 이내 답답해졌다. 태국에서도 유기묘와 유기견을 꽤 봤던 거 같은데...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어 서둘러 돌아 나왔다.



아직 짜뚜짝 시장 밖에 구경하지 않았지만 여러모로 지쳐서 호텔로 돌아가 조금 쉬기로 했다. 그러나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는지 출구는 보이지 않고 계속 새로운 골목만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돌다 겨우 출구를 찾아 나왔다. 일단 좀 쉬자.





지침도 허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시가 다 되도록 조식과 땡모반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늦은 점심을 위해 아속역으로 돌아와 터미널21에 있는 <해브 어 지드 have a zeed>에 갔다. 그리고 전에도 먹었던 똠양꿍과 모닝글로리 볶음, 쏨땀, 땡모반을 시켰다. 어느 하나 맛없는 게 없었지만 이 중 최고는 단연 모닝글로리 볶음. 다시금 생각나는, 지금은 없어진 칭다오의 <소남국 식당>의 음식을 생각나게 하는 맛이다. (소남국 식당은 중국 칭다오에 있었던 곳으로 칭다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아, 아쉬워라.)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맛있기도 해서 배가 불러도 계속 먹었다. 방콕 올 때마다 올 거야.


밥을 먹고 나서는 지하에 있는 <고메 마켓>에 갔다. 지쳤다고 해놓고는 돈 쓸 때는 또 힘이 나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왠지 태국 음식이 생각날 것 같아 쉽게 해 먹을 수 있을 것 듯한 팟타이 키트를 샀다. 여러 회사의 키트 중 '블루 엘리언트'라는 레스토랑에서 만든 것으로 골랐다. 가격은 다른 회사 것에 비해 조금 더 나가지만 면까지 들어있고, 구성품을 사진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찾아보니 후기도 좋았고. 여기에 요즘 방콕 여행을 하면 필수품처럼 사간다는 바나나 사탕도 샀는데 호텔로 돌아와 먹어보고는 당장 더 사야 한다며 흥분했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가히 태국 여행을 기념하는 필수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드디어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방콕에서 만난 북한 사람


평창올림픽 이후 좀 더 친밀해진 남북관계 덕인지 방콕 여행기를 보면 <평양 옥류 식당>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정말 북한 사람들이 서빙을 하는 북한 요릿집이었다. 좀 더 후기를 찾아보니 그중 냉면과 만두가 참으로 맛있다는 이야기에 우리도 한번 가보기로 했다. 마침 우리 호텔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말 북한 사람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평양냉면 200g짜리 두 그릇과 찐만두를 시켰다. 덤덤하게 주문했지만 속은 어찌나 떨렸는지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진짜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는구나. 고작 짧은 주문 몇 마디 해놓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윽고 만두가 나왔다. 밑은 굽고 위는 촉촉하게 쪄진 상태였는데 정말 맛있었다. 냉면이 나오면 함께 먹어야지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계속 손이 가 참느라 혼났다. 가까스로 참고 있을 때 냉면이 나왔다. 직원분이 냉면을 풀어주며 "북한에서는 랭면을 자르지 않고 먹습니다."라고 말했다. 난 냉면은 무조건 잘라먹는데... 하지만 근성 없는 남한 사람이라고 할까 봐 가위를 요청하지 않고 끝가지 다 이로 잘라먹었다. 고작 냉면으로 남한의 근성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만은. 만두는 맛있었으나 냉면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맛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뭔가 생소한 맛. 어쨌든 맛을 떠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언젠가 북한과 교류가 가능해지면 진짜 평양에 가서 냉면 정도는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겠다.



이래저래 시간이 늦긴 했지만 통로에 있는 <더 커먼스>는 자정까지 한다기에 가보기로 했다. 아속역에서 통로역까지는 두 정거장 밖에 안되지만, 통로역에서 더 커먼스는 거리가 꽤 있다. 밤의 방콕을 구경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또 쥐를 봤다. 쥐 정말 싫어!



통로의 거리는 한산했는데 더 커먼스는 꽤 북적였다. 오늘은 낮도, 밤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을 가는구나. 아무튼 더 커먼스의 밤은 낮보다 반짝여서 좋았다.



지난번에 왔다가 음식이 맛없어서 '다시는 안 올 거야!'라고 다짐했던 <로스트 Roast>에 또 왔다. 대신 이번엔 요리는 안 시키고 음료와 디저트만 먹는 것으로. 다행히 오늘 주문한 아이스초코와 딸기 와플 모두 맛있었다. 맛없기 힘든 조합이긴 한데 그래도 여기에선 한 번 당한 기억이 있어서. 앞으로 로스트에서는 디저트만 먹기로 한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나서 아까 고메 마켓에서 산 샐러드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많이 사두었기에 피곤해도 최소 각 한 병씩은 마시고 자야 해.


+ 틴트 오브 블루 이야기

여전히 청소가 되어있질 않았다. 메모와 팁은 사라졌는데. 이럴 거면 팁도 가져가지 말아야지. 전에 주었던 팁도 다시 되돌려 받고 싶다. 내가 억지 쓰는 것도 아니고 호텔에서 방 청소해달라는 건데 그게 어려운가. 결국 내가 바닥을 치우고 닦았다. 아니 내가 청소할 거면 이 돈 주고 왜 호텔을 오나, 에어비앤비도 있는데. 본인들 말로 이틀에 한 번이라더니 화요일 이후로 단 한 번도 청소를 해준 적이 없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2018년 7월 28일

캐논 EOS 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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