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아무 홀드나 잡고 올라가보세요”
나는 한 클라이밍장에 서 있었다. 눈앞의 커다란 파란색 홀드를 잡았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꽉 조이는 클라이밍화 때문에 발이 좀 아팠지만 벽을 타고 올라갔다. 기분이 서서히 좋아졌다. 높이 때문에 조금은 무서웠지만 상쾌했다. 짧지만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클라이밍장 회장님과 사모님을 비롯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민망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 날이 내가 처음 클라이밍을 경험한 날이다. 이 날 느낀, 벽 위에서의 짜릿한 감각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대학생 때, 방학마다 참여하던 모기업의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느 날 클라이밍 클래스가 개설됬다는 걸 보고 호기심에 신청했다. 당시에는 뭐든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운좋게도 내가 다니던 학교 바로 앞에 클라이밍장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운명이라기엔 거창했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당시에는 클라이밍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2025년 지금처럼 스포츠 클라이밍이 대중화 되기 전이었다.
수업 첫 날, 회장님이 직접 스포츠 클라이밍을 알려주셨다. 나이가 지긋하셨고 인상도 푸근하셨다. 무엇보다 클라이밍을 설명해주시는 모습에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키가 크신 편은 아니었지만, 손과 팔이 유난히 크고 길었다. 이 운동을 오래 하신 분이라는 게 느껴졌다.
“스텝 밟을 때는 항상 중심이동을 생각하세요. 삼각형의 꼭짓점을 그리듯이.”
간결한 설명이었지만, 실제 벽을 타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알 수 있었다. 회장님은 부드러운 말투셨지만, 직접 시범을 보이시고 설명하시는 모습에서 이 운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옆에 계시는 사모님은 등반 도중 레이저 포인터나 작대기로 손과 발 위치를 짚어주시곤 했다. 말수가 적으셨지만, 초보자들의 등반을 세심하게 신경 써주셨다. 초보자들이 코스를 완주 할 수 있도록,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오지못하게 조금(?)은 단호하셨지만 직접 손에 테이핑을 해주시는 등 다정한 면모도 있으셨다. 처음엔 무서운 분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모습에 오히려 신뢰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정한 스파르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분이었다.
클라이밍장은 총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루트는 난이도 순서대로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처음엔 자세를 잡는 것부터 시작했다. 삼각자세, 중심 이동, 아웃사이드 스텝, 홀드 잡는 법 등, 하나씩 익혀가야 했다. 이 암장의 분위기는 요즘 젊은 감성의 볼더링 짐과는 조금 달랐다. 힘보다는 지구력과 정확한 기술을 강조하는 올드스쿨 스타일에 가까웠다. 처음엔 벽 앞에 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지만, 한 루트씩 통과해나가는 과정은 꽤 중독적이었다. 특정 루트를 반복해서 연습하고, 어느 날 그 구간을 자연스럽게 통과하게 되는 순간. 그 뿌듯함은 짧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가끔은 내 등반을 영상으로 찍어봤다. 그걸 보면서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었다.
“내가 이런 자세도 할 수 있네?”
운동신경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꽤 신선한 발견이었다.
올드 스쿨(Old School)의 향기가 나는 암벽장. 처음에 손가락 힘, 손바닥 아픔, 익숙지 않은 자세와 아픈 클라이밍화 등 처음부터 볼더링을 시작하기 보단, 몇 개월간 지구력 스타일의 클라이밍을 한게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도움이 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루트를 정복했다는 도파민에 볼더링을 즐기기도 하지만, 지루하지만 기초체력/근력부터 키우는 클라이밍이 부상을 덜 당하게 하는것 같기도 하다. 중간 중간 클라이밍 기술(자세?)를 자연스레 배울 수도 있었다.
등반을 마친 후엔 암장 입구 쪽 TV 앞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전완근이 터질 것 같기에 스트레칭을 하면서 쉬었다. 자연스레 다른 분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티비를 같이 보며 웃기도 했고, 누군가 가져온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어쩌다 보니 비슷한 레벨의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게 됬고, 크럭스 구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면 서로 팁을 주고 받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혼자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말과 공감, 웃음이 이 운동의 또 다른 매력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느 날, 내 등반을 조용히 지켜보던 한 코치님이 계셨다. 크럭스에서 버벅이던 순간, 그분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발을 반 스텝 오른쪽에 두고, 몸을 살짝 비틀어 봐요.”
그렇게 짧게 알려주시곤,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셨다. 쉬는 시간, 물을 마시며 그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 이 운동을 마흔 즈음에 시작했지.”
이미 암장에서 상급 루트를 자유롭게 오르시는 분인데, 시작이 마흔이라니. 코치님의 말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운동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특별히 힘이 세지도, 민첩하지도 않다. 다만 몸이 가벼웠고, 대학교 입학 즈음 ‘체력이라도 길러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달리기와 팔굽혀펴기를 꾸준히 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무의식중에 ‘마흔이 되면 새로운 운동을 배우긴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내가 지금 클라이밍에 푹 빠져, 잘하지 못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꾸준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도 신기하다. 코치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20대인데, 지금부터 꾸준히 하면 나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고중량 헬스도 아닌데, 하다 보면 클라이밍에 맞게 몸이 변하는 것 같은데… 평생 클라이밍을 해보자.’
뜬금없지만, 정말 그런 마음이 생겼다.
우연히 REEL ROCK 11 상영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 때 받은 사은품. 초보용 클라이밍화와 초크백, 테이핑은 최고의 선물이자 행운이었다. 클라이밍에 막 빠지게 될 때쯤 받은 사은품이라 ‘클라이밍은 운명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참고로 REEEL ROCK은 세계 최고의 클라이머들의 도전과 드라마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시리즈이자 이벤트다. 매년 새로운 작품을 묶어 전 세계를 돌며 상영하는데, 압도적인 영상미와 감동적인 스토리로 클라이밍 팬들에게 ‘연중 최고의 축제’로 불림. 추후 기회가 되면 에피소드 편을 따로 다룰 예정이다.
벽을 탈 수록 손은 잘 까지고 아렸다. 그래도 참고, 버티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루트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클라이밍의 묘미였다. 한 2개월 쯤 꾸준히 운동을 했으나, 개강과 진로 준비로 자연스럽게 클라이밍과 멀어지게 되었다. 클라이밍 장에 발을 들이지 못한 시간이 점차 길어졌지만, 마음 한켠엔 늘 다시 운동을 시작하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첫 힐훅(발뒤꿈치로 홀드에 거는 기술)을 걸었던 그날. 홀드 위에 발뒤꿈치가 안정적으로 걸리는 순간, 몸이 가볍게 벽 위로 끌려올랐다. ‘내가 이런 무브를 할 수 있다니!’ 놀라움과 성취감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그 벽 위에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여러분이 클라이밍을 시작한 계기는 무언인가요? 혹은 성인이 되어 시작한 취미는 무엇인가요? 한줄 댓글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