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스위스, 중세 요새 속 클라이밍

프리부르 요새 (Murten Gate)에서 클라이밍을 하다

by 에스카

기대되는 유럽에서의 클라이밍

나는 유럽 클라이밍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유튜브로 보던 영상 속 무대가 대부분 유럽이었고, 세계적인 클라이머들 또한 하나같이 유럽 출신이었다. 하이킹, 트레킹, 클라이밍이 일상처럼 스며 있는 문화라는 점도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마치 그들의 일상 한가운데 내가 들어가 보는 것만 같았다.

스위스에 온 나는 주중에는 연구에 매달리고, 주말에는 마음껏 클라이밍을 즐기리라 다짐했다. 실력은 이제 막 초보 티를 벗은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만큼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레었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딥워터 솔로잉, 알프스를 넘던 옛길에서 시작된 비아 페라타, 다리와 댐에 매달려 오르는 리드 클라이밍, 세계 정상급 클라이머들이 모여드는 매직우드, 그리고 국제대회가 열리는 인스부르크까지—이 모든 장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위스의 이색적인 클라이밍 장소

주중에는 연구실 셋팅, 실험, 학기 조교, 실험기기 사용 교육, 집 구하기 등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정신없는 일과를 보내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프랑스어를 하지 않는 내가 스위스 로컬들과 친해지기는 꽤 애를 먹었다. 그래서 쉴 수 있는 주말을 매우 기다렸다. 그리고, 틈틈이 스위스 내 클라이밍 장소에 관한 정보를 찾아 놓았다. 그러던 중, 프리부르 내 매우 이색적인 클라이밍 장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위스에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한산악회처럼, 칸톤(우리나라로 치면 ‘시’)마다 알파인 클럽이 있었다. 그리고 프리부르 알파인 클럽 사이트를 보니, 고성 안에 볼더링장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중세 요새 도시 프리부르 (Fribourg)

요새 속 클라이밍장을 설명하기 전에, 살짝 프리부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프리부르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 근처에 위치한 소도시다. 교육과 종교로 매우 유명한 도시이다. 아침에 프리부르 역을 가면, 프리부르 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등교하려는 학생들로 엄청 붐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엄청나게 큰 수도원이 존재하는데, 듣기로는 지난 몇몇 교황님들께서 이곳에서 수행하셨다고 한다.

프리부르는 요새도시로 유명했다. 분지지형이기에 프리부르 중심 구시가지(Old Town)는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며, 이를 성곽들이 둘러쌓은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역에서부터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럽에서도 중세 시대의 요새 건물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몇 백 년 동안 개발 없이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이 성곽 어딘가에 ‘Murten Gate’라는 요새 속 클라이밍장이 있다는 것이다. 연구가 끝난 금요일 오후, 난 지체 없이 자전거를 타고 이곳으로 향했다.

프리부르 구시가지 (Old town) swissactivity.com
프리부르 구시가지 (Old town), 대성당(Cathedral)을 중심에 있다. (출처: Vaud 공식 홈)
요새의 도시 프리부르. 지도상 10번 요새에 클라이밍장이 있다 (출처 Frbourg.ch)

요새 속 클라이밍장

나는 우뚝 서있는 요새를 쳐다봤다.

‘이런 곳에 클라이밍장이 있다고?’

클라이밍 장이 있던, 요새 (Murten Gate). 34 m 높이로 나름 웅장했다. firbourg.ch

성문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돌계단을 오르니, 불빛이 서서히 켜지며 아늑한 올드 스쿨 스타일의 클라이밍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은 나무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볼더링 공간은 천장까지 홀드가 빼곡했다. 오버행 클라이밍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모서리마다 설치된 조명이 중세 요새만의 이색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중세 요새 내부를 이렇게 개조할 생각을 하다니!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Murten Gate 내부 볼더링 장. 아늑한 공간 속, 나무 향이 물씬 났다. 아늑했지만 천장 위 홀더들 덕에 오버행을 재밌게 할 수 있었다. 모서리마다 설치된 조명은,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근 거리는 마음과 함께 몸을 풀고,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클라이밍을 하는 동안 지나가던 주민들이 “Allez!” 하며 응원도 해주었다.

요새 속 클라이밍장. 사진출처: https://www.cas-moleson.ch/activites/escalade/porte-de-morat)
천장을 매달리며, 오버행을 정말 재미있게 클라이밍을 했다.

푸른 눈의 꼬마, 그리고 떠오른 한국

얼마나 클라이밍을 했을까? 이미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나는 매트 위에 쪼그려 앉아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런데, 볼더링 바깥에서 7살쯤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한국인이야?’’

푸른 눈을 한 아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아시아인스러운 아이가 대뜸 한국어로 말한다.

‘’응, 난 한국인인데, 어떻게 알았니, 꼬마야? 너도 한국인이니?’’

난 프리부르에서 한국인을 단 2명밖에 보지 못했기에 조금 반갑기도 했다.

‘‘한국 아이돌 노래를 틀어놨길래, 그리고 아시아인이길래 한국인인 줄 알았지. 난 스위스인이야.’’

순간 황당하였다. 뭐라는 거지? 이 아이는? 아이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엄마가 한국인이야. 아빠가 스위스 사람이고’’

아, 프리부르에도 한국인이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떻게 엄마가 한국인인지 물었을 때 조금은 당황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이 후,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스위스로 왔다고 했다. 그때 아 아이의 어머니도 함께 왔다고 한다.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남한에서 태어나 한국의 교육을 받고 우연한 기회로 스위스에 왔다. 이 친구는 분단된 국가를 한 번도 못 가봤겠지만, 할아버지가 북쪽 사람인라니. 한반도의 인간들이 이곳 스위스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이 상황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느새 아이는 집에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날의 Murten Gate는 단순한 클라이밍장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의 흔적, 그리고 분단의 기억이 스위스의 중세 성곽 안에서 겹쳐졌다. 그날 이후, 나는 우연한 기회로 스위스 한글학교 등에 방문하기도 했다. 요새 속 우연한 만남은, 내가 유럽에 자리 잡은 한국인의 흔적, 역사를 찾아다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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