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매한 인간 Mar 14. 2019

37. 희롱의 끝에 남겨진 애매한 사과

<희롱의 끝에 남겨진 애매한 사과>


오늘 오시는 손님마다 다 같은 주제로 이야기한다. 최근 오프라인 속 성희롱과 성폭력을 넘어서, 온라인과 디지털 속에서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몰카로, 그리고 그 몰카의 유포로 파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서 세상 살기 각박한데, 자꾸 이런 안 좋은 뉴스가 흘러나오니 뭘 믿고 살아야 하는지 두렵다. 요즘은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오히려 정신적으로 힘들다. 여기저기의 사건사고들이 몇 초 단위로 바로 내 눈앞에 뉴스 기사가 되어 노출된다. 처음에는 한 사건을 접하고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지만, 이내 곧 새로운 사건사고가 발생해 잊힌다. 이제 작은 교통사고라던가 자살사건은 무뎌진다. 더 큰 사건과 사고에만 눈이 쏠리며, 그런 기사만을 눈이 쫒고 있다. 자극적인걸 찾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무섭다.


사람들이 더 큰 사건과 사고에 눈을 돌릴 때, 묻혀있는 사건들의 당사자는 잊지 못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테다. 이 시간을 빌어 고백하건대 나도 성희롱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 사건은 애매한 사과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아직도 그 기억 속을 유영하고 있는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회사에 막 입사해서 푸릇푸릇한 인턴이 되었다. 그 당시 우리 팀에 인턴은 나를 포함하여 셋이었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우리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워크숍은 사업과 관련된 타기관 실무자들을 초청해서 진솔한 대화를 해보고자 만든 자리였다. 인턴들은 참가자들에게 연락을 하고, 식사 장소, 토론회 장소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무사히 첫날 일정을 소화한 듯싶었지만, 그 이후 일정이 있었다. 한 방에서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인턴들은 술이 떨어지면 술을 채우고, 안주를 사 오고, 주변에 앉아서 비위를 맞추는 역할을 했다. 나는 막 입사해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주변에서 웃으시면 웃고 진지해지면 조용히 경청했다. 눈치를 보며 분위기 파악하고자 무던히 애썼다. 


한참 시간이 흘러 건너편을 보니 한 인턴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서 자리를 박차고 그 인턴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잠시 뒤 1차가 마무리되었고, 나는 곧바로 그 인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그 인턴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는 주름진 손을. 엄청난 충격이 나를 강타했고, 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순진한 대학생이 난생처음으로 목격한 성희롱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서 있을 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인턴의 눈을 보았다. 눈물이 멍울져 차오르다가 꾹 눌러 참아 멈춰있다. 그러다 결국 그 눈물은 또르륵 떨어지고야 만다. 나는 그 인턴에게 화장실 좀 다녀오라고 밀쳐내고, 그 자리에 내가 앉았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주름진 손의 주인공은 내가 오전에 극진히 모셨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 위에 올려진 잔에 소주를 몇 번이고 따랐다. 그냥 마시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거푸 먹였다. 정신을 조금 놓으셨는지 잠시 뒤 나한테 귓가에 속삭인다. "나랑 저 방에 갈래? 난 독실이야" 옆의 과장님과 팀장님은 이야기 중이라 여기에 관심이 없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입은 착실하게 내뱉는다. "저는 방 따로 있어요." 그 분은 이어서 말한다. "내 방이 더 넓으니까 그리로 와." 나는 두려움을 감춘 채 말을 뱉는다. "술 더 드실래요?" 나는 정신을 유지하자고 애쓰는 동시에, 그 사람이 제발 술에 취해 나가떨어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걸까. 결국 그 사람은 만취상태로 뻗었고, 그렇게 2차가 끝났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단계, 노래방이 남아있었다. 노래방으로 이동하는 과장님의 뒤를 바짝 따라간다. 그리고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머무르고 있는 사이, 과장님이 먼저 선수 쳐버린다. "나도 가기 싫은 데 가는 거야. 인턴들이 가서 탬버린 쳐줘야지. 절대 빠지면 안 돼." 탬버린. 탬버린을 치는 게 우리가 부여받은 새로운 역할이었다. 우리 인턴 셋은 서로를 번갈아봤다. 그래, 우리는 고작 인턴이다. 심지어 연장을 앞두고 있는 인턴이다. 이번 일로 밉보여서 연장이 안되면 어떻게 하지? 정식 직원이 못되면 어떻게 하지? 우리는 그렇게 정해져 있는 답을 묵묵히 따라갔다. 


각자 하나씩 탬버린을 움켜쥐고 허벅지에 내리쳤다. 내 앞에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인간들을 본다. 내 옆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탬버린을 치는 인턴이 보인다. 나는 무기력함에 애꿎은 탬버린만 부러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그리고 세차게 허벅지로 내리쳤다. 쨍! 쨍! 탬버린 소린이 크게 울릴수록 내 마음속 울음도 쏟아져내렸다. 노래방 속 어둠에 나를 숨기며 그렇게 수십 번 탬버린으로 나를 내리쳤다. 그게 내가 가진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잠시 뒤 부서장님이 인턴 셋을 찾는다. 우리 셋은 일어나 본다. 술이 묻은 만 원짜리 세장과 오천 원짜리 두장이 노래방 기계 모니터에 붙어있다. 노래점수 90점이 넘을 때마다 만 원씩, 80점이 넘을 때마다 오천 원. 그렇게 모인 사만 원을 우리 보고 가져가란다. 용돈이라고. 굳어있는 다른 두 사람을 대표해서 내가 걷어왔다. 그 축축한 지폐들을 뒷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러나 정작 구겨진 건 지폐가 아니라 내 마음, 내 자존심, 나 자체였다. 


결국 우리 셋은 참지 말자고 결심했다. 뭐라도 안 하면 나중에 이런 우리 자신을 두고 자책할 것만 같았다. 뜬눈으로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팀장님을 찾아갔다. 숙취로 고생하는 팀장님을 앞에 두고 전날의 있었던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조마조마하게 팀장님의 반응을 살핀다. 팀장님은 굳은 얼굴로 끝까지 듣고선, '알겠다'라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워크숍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 그 주름진 손을 보아야 했다. 아침식사 장소를 안내하며, 점심 토론회 장소에 안내하며 그렇게 수어 번 보아야 했다. 행사가 다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저 피곤한 몸을 버스에 뉘어 창 밖을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잘 마무리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팀장님과 과장님을 보았다. 인턴으로서 하나의 주어진 업무를 잘 마무리했다는 그 칭찬에, 우리는 속으로 '알겠다'라고 되뇌었다.


다음날 출근하고 팀장님이 인턴 셋을 따로 부르신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들었어. 그분이 술 마시고 실수한 거라고 미안하다고 하시네." 그래, 잘못한 거에 대해서 사과는 받았는데 그게 다일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미안하다는 말 하나로 지난날의 기억이 다 없어졌으면, 우리의 구겨진 마음을 다 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고작 말 하나로 다 없었던 일로 됐으면 정말 좋겠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인턴'이라는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알겠습니다'라는 말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준생'이라는 시기를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알겠습니다'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카드 집어넣어, 됐어! 됐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