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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r 26. 2019

45. 우리가 '남'을 이야기하는 이유

<우리가 '남'을 이야기하는 이유>


전에는 몰랐지만, 카페를 차리고 나서 알게 된 재능이 하나 있다. 바로 '주변의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이다. 처음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에게 담당업무가 지정되었다. 나는 내가 맡은 업무만 잘하면 되는지 알았다. 하지만 회사생활은 그게 아니었다. 팀원이 출장을 가거나 자리를 비울 때, 팀원에게 인사이동이 있을 때, 팀원을 대신해서 민원인을 응대할 때 등등 수많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주어진다. 따라서 내 업무가 아니더라도 같은 팀원으로서 팀의 모든 업무를 잘 알고, 즉각적으로 대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팀원의 전화받는 소리, 대화 소리, 심지어 혼잣말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들으려고 안간힘 쓰다 보면, 이제 여기에 재능이 생긴다.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쓰는 와중에도 팀원이 뭘 찾고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뭘 말하고 있는지 다 알게 된다. 이 재능의 장점을 꼽아보자면 '팀에 빠른 적응이 가능하다', '즉각적인 대응으로 팀 효율성이 올라간다' 정도 되겠다. 단점은 내가 '꼰대'이자 '호구'가 된다는 점이다. 괜히 잘 들려서 참견하게 되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괜히 팀 업무를 잘 알고 있어서 일이 더 많아진다. 이쯤 되면 이게 재능인지 헷갈린다.


카페에서 나는 의식적으로 손님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 무던히 애쓴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애쓰고 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에 배어 있는 이 재능 때문에 손님들 이야기가 너무 잘 들린다. 너무 잘 들려서 문제다. 카페에서 들리는 주된 이야기 소재 중 하나는 단연 ''이다. 사람들은 나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관심이 많다. 고등학교 때 걔 어디서 뭐 한다더라, 대학교 때 걔는 아직도 취업을 못했다더라, 누구네 아들 서울에 있는 대학교 갔다더라, 누구네 딸이 회계사한테 시집을 갔다더라, 누구네 딸은 토익에서 990점을 받았다더라. 나라고 다르지 않다. 나도 ''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하곤 했다. ''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궁금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은 ''이 뭐하고 사는지, 나의 주변에 있는 ''은 어떻게 사는지 그저 궁금했다. 그리고 ''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재밌었다. 나와는 다른 삶, 나와는 틀린 삶을 사는 ''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이 궁금한 걸까? 


사람들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그보다 위에 있는지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보다 밑에 있으면 불안하고 화가 난다. ''과 동등한 위치가 있으면 안심한다. 그러나 이내 불안해진다.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길 원하므로 자신을 다그친다. ''보다 높은 곳에 있으면 '내가 열심히 잘 살았구나'라고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또 불안해진다. 뒤따라오는 '', 내 앞에 가고 있는 ''들을 보며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을 다그친다. 나는 슬퍼졌다. 삶의 안정감을 ''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내가 밉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가 안타깝다. ''의 이야기로 범벅된 대화 속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고 자신을 채찍질할 뿐,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말은 없다. 


나는 모든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이 재능에 짜증에 지쳤다. 퇴사를 하고 카페를 차렸으니 이제 여유롭게 살아볼까 하다가도, 카페에서 수많은 ''의 이야기를 들으며 초조해졌다. 끊임없이 나와 ''을 비교한다. 유학을 가고, 로스쿨을 가고, 승진을 하고, 억대 연봉을 받고 사는 수많은 ''들에 비해 나는 보잘것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카페에 토플책이며, NCS책이며 온갖 수험서를 가져와서 공부를 하고 있다. 어느새. 또 어느새. 지치지 않고 또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나를 다그치는 내가 가엽다.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 나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서 살고 싶다. 남들이 보기에 뒤쳐져있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불안한 위치에 있더라도 괜찮다. 나 자신이 보기에 지금이, 그리고 매일이 '정말 행복하게 잘 살았구나' 할 수 있는 시점이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부터 내가 가진 이 쓸모없는 재능을 버리기로 한다. 내 인생에서 끊임없이 ''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잡음을 꺼버린다.


(feat. 오늘부로 3M에서 나온 주황색 귀마개를 착용합니다. 주문은 카운터에서 도와드릴게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눈치껏 손님의 제스처, 표정을 보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회사 생활하면서 이 정도 눈치는 기본으로 장착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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