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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Apr 24. 2019

54.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대학교 선배를 만났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출장길에 올랐던 선배는 내가 뜬금없이 카페를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배는 부랴부랴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시간에 잠깐 카페에 들렀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나자 사람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다들 서울, 경기, 부산, 거제, 창원 등 다양한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다. 선배와의 만남도 무려 6년 만이었다. 서로 늙어버린 얼굴을 보고 어색하게 농담을 던진다. "넌 아직도 키가 그렇게 작아서, 땅에 붙어 다니네." 나도 질 수 없지. "선배도 만만찮구먼? 그때 그 노안이 아직도 여전하네요?" 


퇴근 후 배고플 선배를 위해서 밀크티 한 잔, 노릇노릇하게 구운 와플을 들고 갔다. 선배는 배고팠는지 연신 "네가 만든 것 치고 맛있네"를 만발하며 허겁지겁 먹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냉장고 깊숙이 넣어놓은 참외를 깎았다. 선배는 배가 어느 정도 찼는지 찬찬히 카페를 둘러봤다. 평소 책에 관심이 많은 선배는 카페 한편에 진열되어있는 책들을 유심히 본다. 그러다가 혼자서 큭큭 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출근 대신 여행>, <나에게 고맙다>, <미움받을 용기>, <그냥 이대로 나를 사랑해>,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등등. 카페에 진열되어있는 책들만 보고도 내가 어떤 심정으로 퇴사를 하고 카페를 차렸는지 알만 하단다. 책 제목에 내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져 있어 조금 부끄럽다. 나는 참외나 먹으라며 테이블에 접시를 툭 내려놓았다. 아삭. 아삭.


서로 회사에서 얼마나 몸담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3년짜리 였고, 선배는 7년 그리고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 달에 귀여운 쌍둥이 딸이 생겨서, 더더욱 열심히 하고 있단다. 선배는 헤벌쭉한 표정으로 딸들이 자는 모습,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 모유를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배는 사진 수백 장을 보여줘도 부족한지 이어서 동영상도 보여준다. 선배는 지치지 않고 쌍둥이 자랑을 한다. 아이들이 순하고, 눈썹도 짙고, 코도 오뚝하고, 웃으면 얼마나 예쁜지 설명한다. 선배도 이제 아빠 다됐구나. 아니, 진짜 아빠구나. 선배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너무 아기 자랑만 했나 뻘쭘해하며 책으로 화제를 돌렸다. 선배는 한 책을 살펴보더니 한 마디 한다. "2~3년이면 아직 뭐 다 알지도 못하는데, 책을 쓰는 거 보면 사실 좀 읽기 싫어지더라." 나도 글 쓰고 있는데. 괜히 뻘쭘하다.


사실 선배의 말을 듣고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3년이면 사회생활을 오래, 진득하게 해 본 것도 아닌데 뭘 알까? 그러다가 곧 억울해진다. 나는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으로, 회사가 인력난에 허덕일 때 입사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제일 기피하는 부서에 발령받았다. 첫 1년은 업무가 돌아가는 사이클을 익힌다고 바빴다. 중간에 조직개편으로 인해 팀장님도 4번이나 바뀌었다. 그중 3명은 암암리에 소문난 '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악독한 팀장 TOP3' 멤버다. 회사 선배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곤 했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보다는 그 업무를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긴박성이 더 컸다. 맡은 업무가 점차 많아지고, 중요성이 커졌다. 나는 지나친 책임감으로 모든 업무를 다 이해하고, 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있었다. 그래, 내가 비록 회사에 3년밖에 못 다녔지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사회생활해본 거 아닐까? 문득 다른 사람들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경력, 직업, 직종을 떠나서 다들 각자의 사정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나이가 어리다고, 경력이 짧다고 그 사람의 삶이 쉬운 건 아니다. 각자의 고민이 있고, 각자가 치열한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나는 출장지에서 집으로 복귀하는 선배에게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넨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어요. 나는 항상 여기 있을 테니 생각나면 놀러 와요. 선배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도 해주고! 이야기 삯으로 커피 한 잔 드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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