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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y 20. 2020

82. 각자의 젊음, 삶, 인생, 그리고 각자의 고충

<각자의 젊음, 삶, 인생, 그리고 각자의 고충>


카페가 코로나로 긴 휴점에 들어갔을 때, 나는 톨스토이의 '안네 카레리나'를 읽었다. 그냥 인생에 살면서 고전문학을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휴점 기간에 내 온몸과 정신을 엄습하는 잿빛 감정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두 달간의 휴점 기간은 이 장편소설을 끝내기에 충분했고, 이 책의 첫 문장은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안네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모두 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 실제 '안네 카레리나'에서는 이 문장이 역설적으로 쓰였지만, 이 첫 번째 문장 그 자체의 의미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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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찾아온 손님은 어딘지 조금 이상해 보였다. 커피를 주문하는데도 횡설수설 정신이 없어 보였고, 하는 행동도 무언가 산만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난 후, 친구와 통화를 하는 그 손님의 대화도 무언가 이상했다. 대화의 주제가 여기로 갔다가, 저기로 갔다가 난리였다. "오늘 팀장이 회의장에서 면박 주는데 엄청 짜증 났다고. 나보고 요점을 못 알아듣는다고 소리치더라니까. 그런데 지난번 밀면 먹었던 식당이 어디었어? 그래서 팀장(색히) 짜증나 죽겠다, 진짜." 탱탱볼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손님의 대화를 들으니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카페를 창업하기 전 회사에 다닐 때 나보다 2년 먼저 입사한 선배였다. 회사에 다니며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구나' 처음 깨달았는데, 그중 하나는 또라이였고,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아부꾼, 회사의 온갖 정보를 물고 다니는 촉새, 후배들에게 인정받는 일 잘하는 선배, 눈 앞에서 떠먹여 줘야 일을 하는 스푼 같은 사람, 이도 저도 아닌 평범 그 자체의 대다수, 그리고 일머리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2년 먼저 입사한 그 선배는 안타깝게도 일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결제'와 '결재', '게재'와 '개재'를 밥먹듯이 틀리는 사람이었다. 팀장님도, 과장님도 은연중에 그 선배를 무시했다. 자꾸 반복되는 사소한 실수부터 시작해서 멀티플레이가 안 되는 그 선배는 주 업무 선상에서 배제되었다. 어느 순간 선배는 회사에 말 그대로 '출근'과 '퇴근'만 반복했다. 다행인 점은 '안정적인' 공기업이라 권고사직이나, 퇴사의 압박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그 선배를 보고 '편하게 회사 다닌다', '놀고먹는다', '저런 얘랑 결혼하는 사람도 있구나', '나도 일 못하는 척해야겠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나조차도 그 선배와 거리를 두고 무시했고, '내가 봐도 진짜 편하게 직장 다닌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돌연히, 그 선배가 '밥'을 사주겠단다. 바쁜 척 튕겨보려다가 그동안 선배를 무시했던 내 말투와 행동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그저 '죄책감' 하나로 그 선배를 따라갔다. 그 선배를 위함이 아니라, 고작 내 마음의 짐을 덜고자. 선배는 역시나 그렇듯 횡설수설 말을 한다. 나의 안부를 물었다가, 넋두리를 했다가, 월급 이야기를 했다가, 결혼 이야기를 했다. 그 산만한 대화 속에서 이상하게도, 정말로 이상하게도 그 선배가 다르게 보였다. 젊은 시절에 대학잡지 모델을 했었다는 선배, 열심히 하고 싶은데 마음먹은 대로 머리가 안 따라줘서 슬프다는 선배, 후배에게 보기 부끄러워서 하루하루 노력한다는 선배, 다른 사람들처럼 말이라도 청산유수처럼 잘하면 좋을 텐데 말주변도 없어서 본인이 한 일을 포장도 못하는 선배, 이미 주홍글씨처럼 선입견이 박혀있는 회사 사람들에게 10개의 일 중 9개를 해내도 1개의 잘못된 일로 욕을 먹는 선배. 이야기 속에서 선배의 젊음이, 선배의 삶이, 선배의 인생과 선배의 고충이 보인다. 평범한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던 자에게도 감정과, 생각과, 빛나는 삶이 있다. 각자의 삶의 추의 무게가 있는 법이다. 그걸 그때야 깨닫는다.

선배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 사람을 함부러 무시하지말자!!!

통화가 끝났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는 손님. 대로변도 아니고, 오피스 상권도 아니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도 아닌 어중쩌중 애매한 곳에 위치한 내 카페. 그런 외진 카페에 흔해빠진 '커피'를 마시러 온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손님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달달한 쿠키 하나를 선물로 준다. 이리저리 거센 물살에 휩슬려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방문한 이 카페에서 따뜻한 정을 마시길 바란다. 손님에게도 손님만의 젊음, 삶, 인생, 고충이 있을 테지. 부디 한 잔의 커피,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카페인과 카페 주인장의 '응원'을 마시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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