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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Jun 28. 2020

86. 가족과 연을 끊고 싶은 손님

<가족과 연을 끊고 싶은 손님>


간간히 손님들 사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야기 주제는 웃기고, 슬프고, 때론 분노할만한 사연이 많다. 시부모님과 시누이의 시월드 이야기, 여자·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 친구와 축의금으로 싸운 이야기, 층간소음으로 고통받다가 사이다를 먹은 이야기 등등.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가족과의 불화' 문제다. 가부장적인 아빠의 모습에 질릴 대로 질렸다는 집안의 장녀, 하루 살기도 빠듯한데 월급을 용돈으로 요구하는 부모님께 질렸다는 젊은이의 이야기, 노쇠하신 부모님의 병수발이며 부양이며 지치고 버거워서 본인의 결혼마저 포기하게 된다는 직장인의 이야기 등등.


손님들은 테이블에,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지만 마치 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처럼, 아니 그 현장에 직접 있는것마냥 생동감이 넘치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고, 같이 화내고, 같이 분노하고, 때로는 눈물짓는다. 그런데 여러 손님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다 보니 이제 보인다. 각자 다른 손님들이,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혀 '각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두가 비슷한 모양새로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주어진 이 상황들이 모두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 조금만 풍족했어도 가족과 싸울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치열하고, 때로는 권태롭다. 직장인, 자영업자, 학생, 백수 등의 이름으로 하루하루를 버겁게 지탱해오다가 지치면 그대로 주저앉거나 쉬기도 하고, 때로는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를, 제도를, 그리고 자본주의를 한탄한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울고 웃는 자신을 때론 원망하기도 하고,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현실에 분노도 했다가, 그냥저냥 일상을 살아간다. SNS를 조금만 뒤져보면 나오는 명품백을 들고, 외제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호텔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런 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좋을 텐데'라고 헛된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자비 없고 가혹하며, 나는 현실에 발가벗겨 내동댕이 쳐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많지 않다. 삶의 여유, 그리고 경제적 여유만 허락한다면 손쉽게 해결될 문제들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극단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족과 연을 끊고 사는 것이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도, 부담도 다 떨쳐버리고서. 그게 아니라면 인내하고 참다가 결국 체념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더라도 사람을 내뜻대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내 썩어 문들어지는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묵묵히 참고, 견디고,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손님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부모님이 연락하면 한 일주일간 받지 말아 봐', '아, 그 정도면 가족과 서서히 거리를 두는 건 어때?', '그래도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냥 살아야지.', '그냥 너가 포기해'


그런데 말이다. 연락을 피하고, 서서히 거리를 두고, 그렇게 멀어지는. 그런 식의 '외면'은 너무 손쉬운 방법이 아닐까. 그렇다고 '가족이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기에는 내 마음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닐까. 삶을 살아가는데 정답은 없다지만 나는 그 손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외면이라는 손쉬운 방법보다는, 체념이라는 가슴 아픈 방법보다는 힘들더라도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가도 다시 '가족'이라는 끈을 부여잡기를 반복하며 치열하게 살아가 보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선뜻 나가지 못한 것은, 이 마저도 위선적인 답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족이라는 존재가 필요 없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간절히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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