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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Apr 30. 2021

삼겹살과 치킨이 있던 전남친의 면회 날

짝꿍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면서 일기를 쓴다. 이건 전남친과 관련된 에피소드다. 혹시 짝꿍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부디 뒤로가기를 눌러주길 바란다. 


어제 저녁에 가브리살을 먹었다. 한 팩에 12,000원한데다가 양도 많아서 냉큼 사서 구워 먹었다. 와사비쌈무에 한 점씩 싸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어제 거하게 먹었으니 오늘은 가볍게 먹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친구가 치킨 기프티콘을 보냈다. 요새 장사도 안되고 우울할 텐데 닭다리 하나 뜯어먹으면서 힘내란다(땡큐!) 때마침 카페에서 퇴근 후 야식이 땡겨 결국 참지 못하고 치킨을 시켰다. 그렇게 내 눈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을 바라봤다. 그런데 하필 치킨의 닭다리 2개가 나란히 다리를 겹치고 누워있었다. 아, 그 순간 전남친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하게 전남친과의 면회 날이.


여고를 졸업한 나는 한껏 기대감을 품고 대학에 갔다(나도 연애하고 싶다!) 그런데.... 독창적인 패션 세계에 빠져있던 나는 참 인기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청청패션도 불사하고, 멜빵바지에 물감이 마구 튀어있는 펑키한 잠바나 물 빠진 나염 바지를 입기도 했다. 시무룩한 1학년을 보내나 싶었는데, 여고 졸업생의 힘인지 친구들이 소개팅을 시켜줬다. 소개팅인 만큼 무언가 색다르게 보이고 싶어서 엄마가 전공책을 사라고 보내준 15만 원을 탈탈 털어 미니스커트와 웨지힐을 샀다. 그리고 보니 난생 첨으로 머리도 볶았다. 


소개팅에서 만난 전남친은 나보다 한살이 많았는데, 굉장히 어른 같았다. 손이 크진 않지만 섬섬옥수같이 예뻐서 그게 참 좋았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는 그 당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전남친의 사진 속 모델이 된 경우는 드물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편지를 참 잘 썼다. 지금은 활활 태워버렸지만, 전남친의 편지를 읽고 있으면 하루가 행복했다. 들려주는 풍경이야기, 본인의 일상 이야기, 속삭이는 사랑이야기가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전남친에게 빠져들었다. 엄마 아빠는 바뀐 내 패션센스를 통해서 남친의 존재 유무를 파악했다. '저 가시나, 뭔 저런 샤량샤량한 옷을 입고 다닌대. 딱 보니 남자 친구 생겼다고 헤벌쭉해서 다니는 구만'


그렇게 꿈결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남친은 군대에 들어갔다. 면회 날이 되자 전남친은 부모님과 나를 동시에 불렀다. 남친의 부모님을 처음으로 뵌다니 무척이나 긴장됐다. 내가 벌써 며느리감이 된 것처럼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눈치 빠른 부모님은 '얘가 지 남친 군대 갔다고 면회 갈 때가 됐는데'라고 나를 넌지시 떠봤다. 나는 결국 남자친구 부모님을 본다고 고백하고 말았는데, 부모님은 "그래? 그럼 같이 가자"라고 말한다. 헐.


이건 면회인가, 상견례인가. 남친의 어머님은 남친을 보고 눈물을 그렁그렁하고 있었고, 남친의 아버님과 우리 부모님은 어색한 기류 속에 인사를 주고받았다. 면회장소는 부대 내 식당이었고, 치킨, 피자, 삼겹살, 자장면 등 메뉴의 한계가 없는 어메이징한 식당이었다. 남자친구네에서 치킨을 시켰고, 우리네에서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들어가야지"하면서 삼겹살을 시켰다. 면회객이 많아 음식 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엄마는 가방에 싸온 떡이며 빵이며 주전부리를 꺼낸다. 그러다 옆 테이블에 할머니 한 분이 오도카니 앉아있는 걸 보았다. 손자 면회를 오셨나 보다. 엄마는 챙겨 온 일회용 그릇에 떡과 빵을 조금 덜어 할머니께 전해드린다. "기다리면서 드시고 계셔요" 할머니는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잠시 뒤 우리 테이블에 버너와 불판이 세팅됐다. 치익, 지글지글. 향 좋은 냄새가 퍼져나간다. 그런데 살짝 옆 테이블 눈치가 보인다. 손자가 아직 안 와서 혼자 오도카니 앉아계시는 할머니는 떡이며 빵에 손도 대지 않으신다. 5분 정도 흘렀을까, 잠시 뒤 할머니가 그토록 기다리던 손자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지 의자에서 옴싹달싹하며 힘겹게 일어나 손자를 껴안는다. 손자는 할머니를 꼬옥 마주 안는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엄마가 준 떡과 빵을 손자에게 내민다. 손자는 어디서 났냐고 묻고, 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자는 우리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크게 꾸벅 숙인다. "감사합니다." 


잠시 뒤 점원이 들어오고 우리 테이블에 후라이드 치킨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옆 테이블에도 음식을 내려놓고 점원은 나갔다. 테이블에는 음식들로 가득 찼다. 남친과 나. 남친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상견례처럼 되어버린 이 면회장소에 우리는 어색하게 하하호호 웃으며 음식을 먹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말 결혼을 앞둔사람처럼 손에 땀이 나며 긴장감이 몰려왔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남친도, 남친부모님도, 우리 부모님도 다 똑같다. 음식은 비워지기보다 전시되어있었다. 


그런데 자꾸 옆 테이블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옆 테이블을 슬쩍 보니 테이블에는 엄마가 준 일회용 접시 하나와 자장면 한 그릇이 놓여있다. 손자는 할머니에게 어서 먹으라며 젓가락을 내밀고 있었고,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너부터 먹으라 한다. 손자는 할머니 한 입 먹고 나면 먹는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한입을 먹자, 손자가 한입을 먹었고, 할머니가 두입을 먹자, 손자가 한입을 먹었다. 자장면 한 그릇의 시간은 어찌도 짧던지. 금세 비워진 그릇을 할머니는 삭삭 긁어드셨다. 먼저 식사를 마친 할머니와 손자는 자리를 일어선다. 손자는 우리 테이블을 향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꾸벅하고 자리를 떠난다. 


점원이 들어와 순식간에 테이블을 치워낸다. 자장면 한 그릇과 젓가락 두 개가 있는 테이블은 치우는 게 순식간이었다. 비워진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다 우리 테이블을 바라본다. 바쁜와중에도 치킨을 어쩜 이렇게 예쁘게 담아냈는지. 치킨의 두 다리가 예쁘게 겹쳐져서 맨 위에 올라가 있다. 떡이며 과일이며 빵이며 삼겹살이며 온갖 음식에 치킨은 손도 대지 못해 깨끗했다. 나와 남친, 우리 엄마, 우리 아빠, 남친네 엄마, 남친네 아빠. 모두가 모인 꽉 찬 테이블. 삼겹살과 치킨, 밥과 온갖 반찬, 주전부리로 풍요로운 식탁. 나는 그때의 그 풍요로움의 비참함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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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혹시 그날 기억나? 전남친 면회 갔을 때 말이야. 옆 테이블.."

말이 끝나기 전 아빠는 대답한다. "어떻게 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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