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동창 D로부터 연락이 왔다. "잘 지내지? 네 소식은 인스타그램으로 잘 전해 듣고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로부터의 연락이라 조금 당황했다가,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접했다는 게 의아했다. "엥, 나 인스타그램 안 하는데?" 친구는 하하 웃다가 "개인 계정 말고, 네가 운영하는 카페 하고 서점 소식 말이야!" 나는 이내 납득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알았네? 반가워, 오랜만이야!" 우리는 근황 토크를 시작했다. 친구도 애엄마가 되어있었고, 나도 애엄마가 되어버려서 통하는 게 많았다. 근황 토크는 육아에 대한 토로, 가족에 대한 사랑, 학창 시절에 대한 추억 이야기까지 번졌다. 그리고 통화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다."야, 우리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만나서 이야기해" 그렇게 우리 카페&서점은 동창회 장소가 되어버렸다. D를 시작으로 A부터 C까지 친구들이 카페&서점으로 총집합했다. 그날 우리는 이야기꽃을 봉우리까지 피웠고, 만개한 꽃을 피우기 위해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다. 친구들과 자유롭게 수다를 나눌 공간이 있다는 게 참 좋았다. 급번개 동창회를 마치고 친구들을 다 보내 놓고 보니 무언가 찜찜했다. 생각해보니 나 D랑 싸웠었는데? 뭐 때문에 싸웠지?
D는 문과반 1~2등을 다투던 수재였다. 우리는 고3 때 같은 반이었고, 한 달에 한 번씩 짝꿍이 바뀌는 주기를 맞아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점심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치마를 입고 담을 넘기도 했고(담장은 약 3m 정도 했었는데, 때마침 주차되어있던 트럭을 밟고 올라서다 선생님께 걸려 그대로 교무실로 직행했다), 같이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 읽기도 하고,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시시콜콜 주고받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능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부모님의 직업, 부모님의 학력, 가족 재산 등을 묻는 아주 구체적인 조사를 했었는데, 나는 그 종이를 털레털레 들고 집으로 들고 갔었다. 그날 저녁 엄마와 아빠는 자동차를 돈으로 환산했을 때 얼마 정도 될지도 대략적으로 계산해 넣으며 열심히 빈 란을 채워주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늘 했던 조사라서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다 채워진 종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나를 혼란하게 한건 '학력'란이다. 아빠 중학교 졸업, 엄마 고등학교 졸업. 몇 년도에 어디 학교를 졸업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이제 부모님의 학력을 넘어서는구나.' 그 말을 속으로 내뱉고 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마음의 정체는 뭘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쩌면 초등학생 때도 던졌을지 모르는 그 질문을 또 던졌다. "아빠는 왜 중졸이야?" 아빠는 완전 신나는 얼굴로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 했다. "팔 남매로 태어나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지 뭐. 그래도 아빠는 중학교나 졸업했지, 위의 누나들은 중학교도 못 갔다. 얼마나 원망을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고등학교는 못 가고,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농기계 수리하는 회사에 취직했었어. 참, 그때 좋았었는데" 한참이나 그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아빠의 얼굴에는 어두운 빛이 없다. 그때의 고난과 역경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생각, 힘들지만 행복했었다는 회고의 순간이 '그'를 더 빛나 보이게 만든다. 나는 이어서 엄마에게도 물었다. "엄마는?" 엄마는 의외로 답이 짧았다. "운이 좋았지"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나름 잘 채워진 그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다음날 그 종이를 들고 학교에 갔을 때, D는 내게 그 종이를 바꿔보자 말했고 나는 선뜻 내밀었다. 우리 집안만의 재산이나 부모님의 학력을 감춰야 한다거나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부모님은 그만큼 내게 당당했기 때문에 나도 아무런 저항선이 없었다. 바꿔들은 친구의 종이는 정말 빼곡했다. 수두룩 빽빽. 재산은 사실 그 당시 어느 정도의 주택, 아파트, 차, 숫자면 많은 건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아직도 기억나는 건 친구네 부모님의 학력 칸이었다. 멋모르는 촌에서 자란 나도 알만한 대학이었다. 어머님은 숙명여대, 아버님은 연세대. "와!"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친구는 자랑스럽게 부모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는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국어를 정말 잘하신단다. 언어영역을 가르쳐주기도 하신단다. D가 장학금을 받으면 D의 엄마는 몽땅 D가 사고 싶은걸 사라고하신단다. 나는 D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정말 재밌게 들었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와 이런 가족이 있구나. 부럽다.' 내게 D의 이야기는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듯한 느낌이었다. '내 주변에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부모님을 가진 아이가 있다니?'
나는 그날 저녁에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가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 세상에! 내 짝꿍 부모님이 숙명여대 하고 연세대를 나왔대! 대박이지?" 나는 내일도 아니면서 되게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본다.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어니, 조용히 읊조린다. "엄마도 숙명여대 합격했었어" 나는 '무슨 말이지'하고 쳐다보았다. 엄마는 조금은 긴 침묵 끝에 나를 장롱 앞으로 데려갔다. 엄마는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둔 보석함을 꺼냈다. 그리고 보석함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두꺼운 책들을 꺼냈다. 책은 온통 까만색이었고, 제목은 온통 한자로 쓰여있었다. "법학서야" 엄마는 찬찬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엄마가 고등학교 때 정말, 정말 힘들게 사둔 책이야" 엄마는 책을 하나하나 꺼내서 내게 보여준다. 그리고 덧붙인다 "엄마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 엄마도 꿈이 있었어"
멍하니 엄마가 차곡차곡 꺼내놓은 법학서를 바라본다. 나는 왈칵 쏟아지려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내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나를 뒤로하고 엄마가 다시 책들을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 정리한다.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 담긴 보석함. 금반지며 은반지며 온통 귀한 것만 담긴 보석함. 그 보석함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던 엄마의 법학서. 한두 권도 아닌 열 권이 넘는 두꺼운 책들. 그러나 그 책들은 빛 바랜 것 외에는 정말 새것처럼 깨끗했다. 마치 펴보지 못한 것처럼, 엄마의 꿈이 고스란히 잠자고 있던 것처럼.
그날 이후로 나는 D와 거리를 두었다. D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나 스스로가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지탱하기 힘들 만큼 감정이 솟구쳐 올라서, 자꾸만 바깥에서 변명거리를 찾아댔다. 엄마와 아빠라고 불리는 이름의 무게가 느껴져서, 그들의 청춘과 꿈이 너무 아까워서. 그 모든 게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그래서 나는 D와 멀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훌쩍 지나 오랜만에 만난 D와 나는 '엄마'가 되어있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은 시간이 해결해주었고, 우리는 '엄마'가 되어 재회했다. 출산부터 모유수유의 모든 과정을 생생히 나누며 우리는 '엄마'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전화를 끊을 때도, 카페에서 헤어질 때도 '엄마로서, 그리고 나로서도 힘내자'라는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래, 우리는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