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진주에서는 진주유등축제가 단연 최고의 축제다. 진주시민으로서 이런 행사에 빠질 수 없지!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함께 택시를 타고 행사장 근처까지 이동한다. 저녁시간인 데다 행사장 근처라 평소보다 두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역시나. 택시 기사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단다. 개를 그리면 개가 살아 움직이고, 고양이를 그리면 곧 튀어나와 할퀼 것같이 생겼단다. 그럼에도 아들이 미술 하는걸 영 싫어했다고. "콤퓨터로 그림 그린 다고 눈을 못뗀다아이가. 근데 부모라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잽이 다 시켜주고 싶재" 그렇게 그는 3천만 원 있는 현금을 모두 털어 아들의 일본 유학자금으로 대주었다. 그런데 아불싸!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입사하기로 예정되어있던 회사도 잘리고, 학교도 휴학했단다. 계약해놓은 집의 월세만 탈탈 털린다. 곧 끝날 것 같던 코로나는 이제는 평생 함께해야 할 것 같은 전염병이 되어버렸고, 유학자금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바닥이 나버렸다.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라. 그 아아만 안타깝재"라고 아들 걱정을 멈추지 못한다. 기사님은 뒷자리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들을 보더니 이렇게 덧붙인다. "손주가 있기 전에는, 손주 좋아하는 친구들이 헤실헤실 바보처럼 보였는데, 내가 지금 바보가 되어삤더라. 애기 많이 사랑해주이소. 하고잽이 다 시켜주고" 기사님의 덕담과 더불어 서로 정겹게 인사하며 택시를 내린다.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를 옆에 두고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넌." 그래. 난 교통사고가 난 와중에도 렉카차, 카센터 아저씨랑도 친구 먹은 사람이야. 뭘 새삼스레. 이상하게도 이야기는 늘 내게로 걸어오곤 했다. 택시만 타면 기사님들이 말을 걸어오고, 식당을 가면 아주머니들의 푸념 섞인 이야기들이 귀로 들어와 가슴에 머문다. 그것도 지역을 가리지 않고, 어딜 가나 그렇다. 특히 서점을 운영하며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생 또한 늘 내 곁으로 걸어 들어온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저마다 한 권의 책과 같아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이야기마다 남겨있는 삶의 애환과 지혜는 그저 듣고 흘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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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한 편의 이야기가 문을 열고 서점에 들어왔다. 나는 손님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절대 묻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은 늘 그렇듯, 어쩌다 한 단골손님의 인생을 듣게 되었다. 식물 영양제 회사를 운영하다 전문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 25억을 잃은 경험이 있다는 손님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녀는 개인파산까지 갔던 그날을 떠올려본다. 평소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게 너무 좋았기 때문에 한없이 그 마음을 나눠주었고, 그리고 정말 힘든 시기에 애정을 다시 되돌려 받았다. 사업이 말아먹었을 때도 남편과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저 함께 이겨낼 생각만 했단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너무 바빠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때보다, 함께 붙어있으며 아등바등 애썼던 그때가 더 그리워지는 순간도 있단다. 현재도 전 세계적인 경제의 어려움으로 계속 금리가 올라 속상하지만, 이번에도 우리는 잘 이겨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왜 이리 울컥하던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한 편의 드라마를 보았고, 삶을 살아내는 하나의 방법을 배운다. 그 외에도 남편의 인사이동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진주로 와서 외로움을 많이 타는 한 손님의 이야기, 성적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중학생 손님들, 사랑이 최대의 고민인 청년 손님 등등. 수많은 손님의 이야기들을 마음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네들의 인생이 담긴 한 권의 책을 내 마음속 도서관에 보관해둔다.
이런 나를 두곤 감정 낭비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평소 릴케가 한 말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설령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 그 사랑은 당신의 갖가지 경험이나 환별, 기쁨 등의 모든 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실이 되어 당신 생성의 직물 사이를 꿰뚫어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어떠한 체험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도 운명처럼 전개되어 나갑니다. 운명 자체는 불가사의한 넓은 직물 같아서, 그 속에서는 한 올 한 올의 실이 한없이 상냥한 손에 의해 짜이고, 다른 실 옆에 나란히 놓이며, 다른 수백의 실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 인생은 직물 같고, 내가 듣고 겪는 하나의 일들이 한 올 한 올 실이 되어 나를 만들어갈 테다. 인생은 도서관과 같고, 내가 듣고 읽는 하나의 일들이 한 권 한 권 책이 되어 도서관을 채워갈 테다. 모든 이들의 삶은 이토록 놀랍고, 아름답고, 지혜로움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