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계절이 바뀌니 몸이 무겁네. 나 먼저 출근한다! 오늘 하루도 힘내라!" 부스스 일어나서 남편이 보내고 간 메시지를 확인해본다. 가을은 여실히 느껴지고 이제는 겨울이 저 멀리서 '나 곧 갈게!'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이런 날은 확실히 몸이 무겁다. 계절이 변화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몸도 그에 반응하고 적응기를 갖는다. 이제 추운 겨울이 올 거니 대비하라고 미리 찬바람이 경고하면, 내 몸이 그 신호에 반응하듯이.
남편은 매일 오전 5시에 기상해서 출근한다. 지금은 나름 근거리인 창원으로 출퇴근을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울산과 경주까지 일하러 갔다. "하루에 세네 시간 자는 일상을 6년간 반복했잖아. 이 정도면 사람이 죽겠구나 싶었는데, 다 살아지더라"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의 몸에는 매일같이 작은 생채기가 있었다. 그는 내게 다치면 다쳤다, 힘들면 힘들다 말하는 법이 없었기에 늘 큰 상처만이 눈에 띄었다. 공사현장의 일은 고되고 또 하루하루가 처절해서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썰물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그렇기에 늘상 막내로밖에 있지 못했던 그는 일터를 이렇게 회상한다. "공사장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 보면 다 가장이야. 그 무게 앞에서는 소장이든 막내든 다 같아" 그의 말 속 '가장'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본다. 기술은 진보하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가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애처로움은 변하지 않는 듯하다. 힘들지 않냐는 내 물음에 "살아가는데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나. 주어진 하루를 그냥 묵묵히 살아내는 게 삶인 거지"라고 답하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우직해서 웃음만 나왔다.
남편은 내게 화강암을 떠올리게 만든다. 화산 활동과 강력한 압력으로 생성된, 거칠도 단단해서 왠지 모르게 듬직한 화강암 말이다. 화강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고도 가장 널리 덮여있는 돌이다. 이 희읍스름한 화강암은 참 단단해서 디딤석이나 계단, 건축물의 외장재로 많이 쓰인다. 건축물에서도 내부가 아닌 꼭 '외부'에서 그 쓰임을 다하는데, 모진 풍파를 다 견뎌내는 그 강인함과 우직함이 엿보이지 않은가. 때마침 읽고 있던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에도 궁의 건축자재로 화강암이 등장했는데, 나도 모르게 "남편 이야기네"라고 읊조렸다. 비단 남편뿐일까. 동트기 전 건축현상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화강암일테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에서는 화강암을 이렇게 소개한다. "유럽에서처럼 수려한 대리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궁에서는 유럽의 궁 곳곳에 놓인,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매끈한 피부의 대리석 조각상은 찾기 힘들다. 대신 정강이뼈가 쪼개질 듯한 추위와 정수리를 녹여내는 더위, 돌연 찾아오는 태풍과 건조한 공기를 수백 년간 견디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화강암이 있다. 나는 이것이 어쩐지 대단하게 느껴진다." 묵묵히 그 우직함을 쌓아온 그네들의 돌 같은 모습이 내게도 하루를 시작할 힘을 쥐어주는 듯하다.
남편은 내게 본인은 '깊이 고민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한 마디, 한마디의 말에서 일상의 철학을 깨우친다. 자기 인생을 그 자신만큼 진지하고도 철저하게 생각하는 이가 어딨을까. 그대의 삶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대에게 때론 연민을 그리고 자주, 사랑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