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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Jan 05. 2023

15. 오늘의 온도는 매우 따쑤움

나는 내게 주어진 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다. 간혹 그 하루가 슬프고 우울하고 때론 처절한 순간이 있을지라도, 주어진 하루가 감사하고 또 소중하게 생각될 정도로 나는 잘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그건 정말 잘 살아낸 삶일까?' 오롯이 내게만 집중한 삶, 나만 집중한 삶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


10시쯔음 손님 한 분이 들어왔다. 작년 하반기부터 독서모임에 참여해서 부쩍 친해진 손님이다. 늘 그렇듯 따뜻한 레몬차를 한 잔 시키고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어라? 손님이 조금 이상하다. 가방에서 무엇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고, 내게 말을 걸까 말까 주저한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저 망설임이 안쓰럽게만 다가온다. "무슨 일 있으셔요?" 내 물음에 용기를 얻었는지 손님은 "사실, 제가 네이버 블로그를 해보고 싶은데요"라고 서두를 꺼낸다. 


언젠가 회사에 가있는 남편이 부탁을 했다. 급하게 필요한 파일 하나를 메일로 보내달란 거였다. 남편은 나를 위해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노트북을 전원을 켜, 그리고 비밀번호를 입력해. 비밀번호는 '영미1234'. 아니, 영미를 그대로 치라고. youngmi가 아니라 한글 그대로 쳐. 그러니까 dudal!  그래, 여기까지 했지. 그리고 바탕화면에 있는 폴더로 들어가." 남편이 말하는 드래그가 무엇인지, 파일을 끌어다가 메일에다 붙이라는 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는것 투성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를 답답함과 조급함으로 가득 차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사소한 것으로 짜증을 안기는 자기 자신이 너무 화가 날 뿐이다. 그렇게 내게 컴퓨터는 영영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말이죠. 독서모임을 시작하며 읽은 책들이 꽤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 좋은 책들을 이젠 금방 까먹는 나이더라고요. 그게 너무 아쉬워서 블로그를 해보려고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게 무엇이 어려워서 이렇게 힘들게 부탁을 하는 걸까. 그게 뭐 큰일이라고 이렇게 마음먹고 말을 꺼내는 것일까. 그녀 옆에 내 노트북을 가져다 붙인다. "시작합시다"


시작한 지 10분 만에 즉석 블로그 강의를 듣는 사람은 둘로 늘어났다. 네이버 블로그에 들어가는 방법, 블로그 이름과 프로필을 바꾸는 방법, 글을 쓰는 방법을 설명한다. 물론 중간중간에 드래그가 무엇인지, 'ctrl+c'와 'ctrl+v'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설명한다. 아, 마우스 휠이 무엇인지도. "블로그에 사진을 넣고 싶으면 이렇게 위에 카메라 모양을 누르고 파일을 업로드하면 된답니다. 파일을 가져오는 방법은 제가 알려드렸죠?" 이어서 동영상도 추가해 보고, 지도도 넣어본다. 그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아! 내가 맛집 검색했을 때 봤던 게 이런 거구나!" 딸칵딸칵 마우스 소리가 들리고 이어 '오오!' 하는 감탄사가 연발로 터져 나온다. 열기로 두 볼이 발그레지고 광대는 올라가고, 입술은 치아를 감추었던 장막을 걷는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컨트럴 키를 누르고 A를 누르면 모든 글이 한 번에 드래그됩니다. 그러고 나서 글자 크기나, 정열을 바꾸면 모든 글에 적용됩니다." 그녀들은 내 바람 그 이상의 환희를 드러낸다.


*


"제 하루는 굉장히 바쁘거든요.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그 사이 집에서 빨래를 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거죠. 그리고 아이가 둘이니까, 각자 학교로 학원으로 픽업을 다녀오면은 오후 다섯 시가 돼요. 그때는 이제 저녁을 해야죠. 오늘은 이상하게 잠시 커피가 마시고 싶었어요. 이 시간이 내게는 집안일이나 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고 온 시간이거든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자리를 뜰 수 없었어요. 이상하죠. 늘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포기했던 것을 우연히 만난다는 건 굉장히 신비로운 일이에요."


*

나는 오늘 눈화장이 번질 정도로 웃었는데, 그 찰나가 내게 슬로우 모션처럼 새겨졌다. 뒤에서는 오후의 햇볕이 따스하게 내려쬐고 있었고, 우리는 그 해를 등지고 나란히 앉아있다. 한 명은 고개를 뒤로 젖혀 웃었고, 한 명은 고개를 숙이며 박수를 쳤다. 다른 하나는 배에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목젖을 내보였다.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살아가야 할 내일의 양태를 그려볼 수 있다. 내가 머물러야 할 내일의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이 오늘 내가 배운 삶의 내용이다. 이것이 오늘 내가 느낀 삶의 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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