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부탁을 하는 쪽인가, 부탁을 받는 쪽인가? 서른 살 이전의 나는 주로 부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죄송한데 이것 좀 해도 될까요?" "이것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사회에서의 경험도, 삶의 연륜도 부족했던 내게는 '부탁'이 꼭 필요했다. 부탁이 때론 행동을 허락해주기도 했고, 몰랐던 부분을 메워주기도 했다. 그래, 서른 이전의 나는 부탁함으로써 하루하루를 꾸려나갔던 것 같다. 부탁함으로써 조금 더 자립할 수 있는 나로 바뀌었던 것 같다. 부작용이 하나 있다면,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는 늘 '죄송한데'를 달고 다닌다는 것. 식당에 가서도 "죄송한데, 반찬 좀 더 주실 수 있으실까요?", 카페에 가서도 "죄송한데 화장실은 어디일까요?" 서른 살이 넘은 나는 이제 주로 부탁을 받는 편이다. 아들로부터 "엄마, 도와주세요", 남편으로부터 "오늘 설거지 좀 해줄래?" 그리고 손님으로부터도.
이제 서점에는 제법 단골손님들이 생겼다. 손님들은 저마다 '나는 1년 차 새내기' '나는 5년 차 시조새'라고 말하는 정도랄까. 그 말에 녹여있는 시간의 축적과 애정이 참 좋다. 그래서일까 손님들에게 나는 특이한 부탁을 많이 받는 편이다.
- 잠시 외출을 해야 하는데, 우리 아들 좀 봐줄 수 있을까요?
- 착불 택배를 받아야 하는데 보관해주실 수 있어요? 착불비는 드릴게요
- 우리 딸이 이번에 독서공모전을 나가는데, 독후감 좀 봐주세요
- 우리 아이가 이번에 전교 회장에 나가는데, 공약을 PPT로 담아주세요
- 블로그, 인스타그램을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알려주세요
- 카드뉴스 같은 건 어떻게 만들죠?
이런 부탁은 내게는 무척이나 사소하게 다가온다. 내가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고, 나라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다. 4년 차 직장생활, 5년 차 카페·서점 운영자, 4년 차 공모사업 기획자로 있으며 생긴 능력은 온갖 잡무 해결능력부터 사무능력까지 아우른다. 찰나의 시간만 들인다면 해낼 수 있는 일, 손님들의 부탁은 그토록이나 사소했다.
그런데 점차 무언가 내 마음속의 평정이 무너지는 듯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감각이 나를 예민하게 몰아세운다. 시간이 지나니 점차 호혜적인 마음을 바라고 있다.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너도 내게 무언가를 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내 마음은 이기적인 걸까? 너무도 계산적인 걸까?
어느 날 한 날은 매장에서 블로그 강의가 열렸다.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개설하는 방법부터, 블로그의 대문 바꾸기, 포스팅하는 방법, 사진/동영상/인용문을 올리는 방법 등등 알차게 구성된 강의였다. 1:1로 시작된 과외는 커피 한 잔 하러 들른 손님이 합류하여 2:1로 진행되었다. 마우스로 텍스트를 드래그조차 하지 못하고, ctrl+c 와 ctrl+v의 기능을 모르는 손님이었다. 어땠을 것 같은가? 굉장히 답답하고 속 탔을 것 같은가? 아니, 되려 너무 재밌어서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고, 강의가 끝난 뒤의 나의 두 볼은 발갛게 열이 올라있었다. 블로그에 사진을 첨부하는 방법을 알려줬을 때 손님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텍스트의 복사 붙여넣기 방법을 알려줬을 때 그들은 '세상에 이런 기술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대화'를 나눴다. 각자가 가진 인생을 공유했다. 주부라는 직업을 가지며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인간이라는 직업을 갖고 사회의 쓸모가 될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픔을 나누고 서로를 다독인다. 두 시간의 강의 이후 두 손님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다. "소중한 시간을 뺏어서 어떡하죠? 이런 부탁, 정말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좋은 강의를 들었으니 강의료를 드리고 싶은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한다. 이미 사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누면 복이 된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을 언어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렇기에 나는 부탁을 들어주었기보다,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고 또 배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손님들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때 모두가 꼭 이들과 같은 건 아니다. 당신이 부탁을 하고, 내가 그 부탁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나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나의 마음씀에 어떠한 호혜적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당연하게도 상처 입는다. 그렇기에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너도 내게 무언가를 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내 마음은 '정말' 이기적인 걸까? '진짜' 너무도 계산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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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별일 없니?" 늘 그렇듯 투박하게 "별일 없고 늘상 똑같지 뭐"라고 답한다. "뭐 필요한 건 없어?"라는 엄마의 물음에 내 뇌는 이것저것 떠올린다. "아, 맞다. 육수 내는 다시마랑 멸치가 떨어졌어. 아빠가 이번에 다시마 좀 캐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번에 굵은 고춧가루랑 참기름은 좀 있어? " "응응 있지. 시금치가 제철인데 안필요해? 집에 굴비도 많다. 좀 보내주랴?" "응 아들이 잘 먹어" 이런 내 말에 엄마는 타지 멀리 있는 딸, 사위, 그리고 손자를 떠올린다. 늘 평온하길. 늘 하루가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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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 앞에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하나 도착해 있다.
박스도 센서등이네요. 부모님은 늘 내 마음의 빛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