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분주했다. "어디 보자. 신분증은 챙겼고, 지방세 어쩌고 저쩌고 하는 서류도 가방에 잘 들어있고! 됐다! 가자, 아들!" 오전 8시 40분,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그토록 다짐했던 일, 대출금을 상환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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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기침 한방으로, 매장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대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고, 인생이 잘못될까 두려운 내게 '지금이 대출이 필요한 순간이구나' 생각하게 했다. 내게는 인생의 엄청난 도전으로 방문한 은행은 고민도 없이 퇴짜를 놓았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내 이름 석자가 새겨진 명함을 들고 다니던 시절에는 통장, 그거 하나 개설하기는 일도 아니었다. 통장을 하나 만들고 싶다? 무슨 고민이 필요한가. 그냥 은행 가서 만들면 될 것을. 그러나 자영업자가 된 내게는 통장 하나 만들어주는 은행이 없었다.
"주거래 은행에 가셔요"
"여기가 주거래 은행인데요..."
"..."
통장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은행이 어떻게 대출을 해주겠는가. 나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주의의 섭리를 몰랐다. 사람 간의 인정과 신뢰가 마음에서 형성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삶은 늘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었다. 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너무 내 머릿속 꽃밭에서 살고 있었구나. 은행에서의 신뢰는 안정적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정기적인 월급일 뿐.
한참을 헤매다 신용보증재단에서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신용보증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재단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대기석부터 꽉 차있는 인파의 얼굴들에는 긴장과 불안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태도에서부터 비굴과 초라함이 보였다. '빌리다', 이 빌리는 게 무엇이길래 이렇게 스스로에게 모욕을 주는 것일까. 빌리는 것이 빌붙는 것은 분명 아닐 텐데. 다들 두 손에는 부가가치세표준증명원이니, 지방세국세완납증명서이니 온갖 서류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늘 하나의 서류가 부족하다. 사업등록증명원이 없다고 다시 발길을 돌려 터덜터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뭐도 모르는 채 '여기 사인하세요'라고 하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물론,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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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툭 날아온 문자 하나가 나를 뒤흔든다. 대출이자가 6~7%로 변동된다는 통보였다. 고작 천만 원 대출에 6~7% 이자가 뭐가 대수냐 싶겠다만, 나는 과연 이 파도와 같은 변동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다. 직장인 시절 내 집마련이라는 꿈을 꾸고 주택청약에 가입했다. 뭐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지만, 매달 정기적으로 돈을 넣곤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은 무려 910만 원이다. 물론 퇴직과 동시에 납입이 멈춰서, 지난 5년 동안 입금액이 제자리걸음이긴 하다. 나는 이 종잣돈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대했다. 좀 허무맹랑할 수도 또 너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양한 상상을 해보는 편이다. 남편이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지? 남편과 이혼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망한다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러니 주택청약에 모아놓은 이 돈, 910만 원은 그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서 내가 새로이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줄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비극적인 상황 끝에서도 억세게 생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나만의 신용이었던 것이다. 내 마지막 남은 밑천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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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우리를 흔들어놓곤 한다. 우리는 늘 그렇듯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오늘 나는 주택청약 910만 원을 해지했다.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인가 보다.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 어린 아들의 손을 기어코 끌고 같이 은행에 간 것도,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고작, 청약 해지하는데 왜 이리 청승이니'라며 내 마음을 부여잡는 것도. 다 내 용기가 모자란 탓이구나 한다. 10년간의 청약을 해지하고 이자와 함께 받은 960만 원에, 모아놓은 돈 42만 원을 얹어 대출금과 이자를 상환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두 장의 영수증을 번갈아 바라본다. 주택청약 해지 거래내역 확인증과 대출금 영수증.
"그래, 정말 필요한 순간에 정말 잘 썼다."
오늘은 삶의 낙관이 필요한 순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