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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Feb 22. 2023

18. 진상손님의 진상(眞相)짓

여러분은 나와 결이 맞지 않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는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사람과 거리 두기를 하는 거다. 그러다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면 '거리두기 하길 참 잘했다'라고 되뇌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는 낯선 환경에 던져지고 친구를 사귀어야만 한다. 친구들의 무리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것만으로도 눈물겹게 힘든 과정이지만,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나와 '맞는' 무리를 찾아 유목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오롯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간이라는 직업에 적응한다. 


내게 여느 날과 달리 조금 달랐던 것은 고등학교 때인듯하다. 친구를 사귀고, 맞지 않으면 멀어지고, 새로운 무리를 찾고, 교유관계를 유지하다, 맞지 않으면 절교한다. 이런 도돌이표와 같은 인간관계 방식이 고루하고 지난하게 느껴졌다. 이때부터였다. 나와 결이 맞지 않은 친구들과도 교우관계를 유지해 보자고 결심한 것이. 절교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대신말이다. 대표적인 친구로 J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학교에서도 소문난 지랄병이 있었다. 공부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책걸상을 걷어찼고 욕을 지껄이곤 했다. 그리고 S급 마이웨이가 확고한 친구라 내 의견을 들어주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와 인연을 지금까지, 15년 이상 이어가고 있다. 물론 15년 동안의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어쩌면 이마 오른쪽 탈모의 원인이 이 친구일지도 모른다)


자영업을 시작하고 나서 다양한 인간군을 보게 된다. 우리가 흔히들 '진상손님'이라고 묶어서 부르지만, 이 진상손님의 진상 스타일도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아이를 영업장에 온종일 맡겨두는 학부모형 진상, 커피 한 잔 시키지 않고 영업이 시작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거는 경청요구형 진상, 대량의 빨대˙테이크아웃컵부터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까지 커피 한 잔 값으로 퉁치려 하는 생활보조형 진상, 서점에 와서 책을 구매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데다, 도서 판매 증진을 위해 진행하는 다양한 무료 행사만 노리는 문화거지형 진상 등등(열거해놓고 보니 너무 적나라하게 쓴 내가 너무한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도 예상했듯이 나는 이러한 진상손님과 5년째 연을 이어가고 있고, 신규 진상손님과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나는 술만 마시면 늘 똑같은 고민을 내뱉곤 하는데, 고민의 주제도 늘 동일하다. 학창 시절엔 J였다면 요새는 진상손님일 뿐. 진상손님들은 내 이마 왼쪽 탈모의 원흉일지도 모른다. 항상 스트레스받고, 매번 괴로워하면서도 관계를 단절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나를 두고 함께 술을 마셔주는 이들의 반응도 한결같다. "본인이 스트레스받으면서 왜 인간관계를 유지하느냐" "그 사람에게 줄 신경을 주변 사람들에게 더 쏟아라"  그래, 안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다. 누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면 나도 똑같이 조언해 줄 거면서, 막상 나는 그게 안되는 거다. 왜 그런 걸까? 왜! 나는 나를 관찰해 보기로 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어떤 생각을 하길래 왜 분명한 길을 회피하는가? 진상손님들은 싫은 점이 분명하다. 하지만 막상 그네들 얼굴을 보면 싫었던 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냥 반갑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가도 진상손님들이 진상의 행동을 하면 그 즉시 내 마음도 반응을 한다. 그렇지만 찰나일 뿐, 내 분노는 또 차분히 가라앉는다.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하면서. 그렇게 나날이 그네들과의 세월이 더해질 뿐이다. 이런 나를 나조차 이해할 수 없다. 휴.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답을 찾았다. 책 <미키7>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한 친구란 있을 수 없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점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내친다면 그들이 가져다줄 기쁨과 행복 역시 누릴 수 없게 된다" 진상손님들은 나의 진상(眞相)을 살펴보게 만든다. 그들을 '진상'으로 규명한 나 자신의 진상을 냉정히 돌아보게 해 준다. 마음의 왜곡 없이, 일말의 거짓도 없이 그 사람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진상손님이 말 그대로 진상(眞相) 손님인 것이다. 나는 그네들과의 관계에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도 있었지만, 분명 함께라 좋았던 시간의 축적이 있다. 통각을 더 오래 기억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인 걸까, 왜 그네들이 주는 기쁨을 나는 더 오래 기억하지 못했을까.


오늘 방문한 진상손님은 결합형(학부모형+경청요구형)이다. 오전에 놀러 왔다가 오후 느지막이 나간 이 손님은 20분 뒤에 다시 가게로 들어온다. "뭐 두고 가셨어요?"라고 묻는 내게 검은색 봉지를 내민다. "김밥이에요. 밥도 못 묵었을 낀데, 이것 좀 드시소" 입안에서 오이와 당근이 으깨지며 아삭 소리를 내는 김밥을 먹으며 그네들의 진상을 느껴본다. 곧 봄이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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