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 문산읍에서 자그마한 서점 겸 카페 '보틀북스'를 운영하며,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일기로 적기 시작했다. 직장인이었다가 자영업자가 된 나의 변화, 하루 매출 0원이 주었던 좌절감,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삶을 살아낼 용기를 주었던 손님들과의 일화. 이 모든 글들을 '애매한 인간'이라는 필명으로 적어 내렸다. 그런데 왜 하필 필명이 '애매한 인간'이었을까?
필명은 내 이름을 대신하는 단어다. 그렇기에 나를 상징하고, 대표해야 하는 단어여야 한다. 하지만 나를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를 정의 내릴 그 어떠한 멋지고 예쁜 필명을 찾을 수 없었다. 가진 재능도 능력도, 돈도, 그 무엇 하나 특출 나게 잘하는 게 없는 나. 자기 브랜드화 시대, 개성의 시대, 모두가 전문가와 기술자를 지향하는 세계에서 애매하게 부유하고 있는 나. 그게 바로 '나'였다. 그래서 멋들어진 필명을 가져와 나를 포장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애매한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애매하다'라는 뜻이 도대체 뭘까?
어미가 모두 '아니다' '못하다'와 같이 부정적으로만 끝나는 '애매하다'라는 뜻이 슬프기만 하다. 그렇다면 말이다. 모든 것이 애매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뭐든 아니고, 뭐든 못하는 인간에 불과할까? 성적, 성격, 능력과 재능, 가진 돈 그 모든 게 애매한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스스로를 '애매한 인간'이라고 부른 지 5년 정도 지났고, 오늘날의 나는 이 사전적 정의가 틀려먹었다고 말하고 다닌다. 되려 '애매하다'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한다. 아니 사랑하는 걸 지도 모른다. '애매하다'라는 단어로밖에 나를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애매함이 나를 만들어냈음을 깨닫는다. 애매함 투성이인 나지만, 애매한 것들끼리 만나면 하나의 재능이 됨을 이제는 안다. '애매하다'라는 단어는 세상 그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애매한 인간이라는 필명을, 필명을 넘어서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게 됐다. 애매한 인간인 나, 정말 멋지고 매우 사랑스럽다!
처음 출간한 책인 <엄마는 카페에 때수건을 팔라고 하셨어>의 표지와 삽화 그림 모두 내가 그렸는데, 표지와 삽화, 그 그림들 속에는 공통점이 있다. 뭘까? 바로 '하체'가 없다는 거다. 한 번쯤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나의 그 결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테다. 바로, 상체를 그린 후 하체를 이어 그리면 이상하게 전체 비율이 맞지 않는 점. 눈도 항상 두 개인데, 하나를 그리면 나머지 한쪽은 항상 짝짝이가 된다는 점. 손가락은 어쩜 그렇게 섬세한지, 무조건 주먹으로 그리는 게 속 편하기도 하다. 이 정도 되면 나의 그림실력이 짐작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런 그림 실력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과감히 하반신을 포기해 버림으로써, 눈에 반짝이는 큐빅은 없지만 단추모양으로 그림으로써, 내 그림을 종이책의 표지와 삽화에 써먹었다. 애매하기만 한 나의 그림이 애매한 글을 만나, 그렇게 종이책 <엄마는 카페에 때수건을 파라고 하셨어>가 완성됐다.
'보틀북스'를 조금 살펴볼까? 밀크티와 베이글(특히 곁들여진 땡고추크림치즈가 맛있다(강추!))을 특화해서 판매하는 카페이지만, 8평짜리의 규모에 비해 1,000여 권 정도의 방대한 책을 보유하고 있는 서점이기도 하다. 매달 20~25여 개의 독서모임이 열리고, 200여 명의 독서모임 멤버들이 활동하는 독서동아리의 아지트 이기도 하다. 또한 꽃꽂이, 비누 만들기 등 다양한 원데이 클래스와 작가초청 북토크쇼가 열리는 문화모임의 장이기도 하다. 그럼 보틀북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카페? 서점? 문화회관? 글쎄, 굳이 뭐 하나로 정의 내려야 할까? 굳이 한 단어로 말하자면, ‘애매한 공간’이 아닐까?
애매하기 때문에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실험력을 얻는다.
애매하기 때문에 그 무엇이든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갖는다.
애매하기 때문에 그 무엇이든 괜찮다.
공간이 변화하는 만큼, 스스로의 마음가짐도 변했다. 나는 사실 굉장히 싱거운 사람이기도 하다. 확고한 취향과 취미도 없다. 개성이 중요시되는 사회라지만 유행을 따라갈 뿐, 나만의 개성이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학창 시절, 좋아하는 아이돌도 없었고, 옷 입는 취향도 그 당시 유행했던 패션을 따라 하기 급급했다. 이런 나를, 나는 굉장히 싫어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지 않았던 나, 싱겁기만 한 내가 꽤 멋진 사람임을 안다. 싱거운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었다. 조금 짠맛을 내는 사람과 어우러지면, 나 또한 짠맛을 내기도 했고, 단 맛을 내는 사람을 만나면, 나 또한 달달해졌다. 보틀북스에 방문하는 200여 명 정도의 손님들. 성별도, 직업도, 나이도 세대도 다르지만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여긴다. 이런 포용력은 확실히 애매함의 힘이다.
나는 ‘애매하다’라는 단어 덕분에 많은 직업을 동시에 얻었다.
카페 사장이자, 서점주인, 모임을 진행하는 책방지기이자 진행자,
KBS진주 라디오에서 매달 책 소개하는 코너를 맡기도 하고,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문화기획자이자,
진주에서 터를 잡고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애매한 인간이지만, 오늘 하루를 오롯이 잘 살아내고 있는 건 애매하기만 한 나이다.
특출 난 재능도 없고, 전문 지식이나 기술도 없는 애매한 인간.
그 애매한 인간의, 프로N잡러 생활기를 이제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