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나는 유치원에 인맥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던 두 명의 학부모다. 이렇게 만난 김에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예상했듯, 부모의 참관수업이 시작되었다.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던 빨간색 포르셰, 명품 가방 1인 1백 소지, 아이의 교육(학원, 과외 등)이 주요 주제였다. 동석한 학부모가 "나도 포르셰를 뽑았는데, 아직 차가 안 나와요"라고 한다. 맞은편에선 "요샌 차 예약하고 나오려면 1년 걸려요!"라고 대답한다. 아, 그렇구나. 타고 온 차도 제네시스였던것 같은데. 오늘 나는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하늘색 클릭이 아니라, 남편의 하얀색 산타페를 타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평상시 누군가 명품을 사거나, 차를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와, 정말 좋겠다! 예쁜데?"라는 말을 할 수 있다. 호들갑을 떨며 함께 기뻐해줄 수 있다. 나의 재정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그다지 욕심나지 않는다. 그저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데, 하필, 오늘은 다르다. 그 순수한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사돈이 땅사면 배 아프다'라는 그 질투심일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일까? 평상시 동갑인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들을 만날 기회가 없다. 하지만 참관수업을 통해 드디어 대면하게 된다. 동갑인 아이를 키우는 비슷한 연령대의 학부모들. 각기 삶을 살며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는가 가늠해 보게 돼서 그런 걸까? 비교를 통한 비참함일까?
이런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서 고민해 보다 이윽고 답을 얻는다. 내 마음이 그토록 흔들렸던 건, 바로 죄책감이다. '동갑'인 아이를 키우는 같은 학부모이지만, 그 학부모의 환경이 다르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는 삶을 살면서 부모의 재력이 아이의 교육이나 살아가는 환경, 직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봐왔다. 그렇기에 오늘 고작 유치원생일뿐인 아이들의 참관수업이 더 가슴 아픈 거다. 동갑인 아이들, 하나같이 예쁘고 순수하고 귀엽고 잘생기고 멋졌던 아이들. 그 아이들은 나중에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될 테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길을 닦고 만들어줄 수 있을까? 돈은 필요없다, 아이에게 정서적인게 최고니까 나는 더 애정을 베풀면 된다고 정신승리하면 되는걸까?
마음이 무거운 채로 집으로 들어왔다. 참관수업을 궁금해하는 남편을 앞에 두고, "이번에 클릭 폐차시키고, 차 새로 하나 뽑을까?"라고 물어본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실성하며 웃으며 묻는다. "어때, 내친김에 가방도 하나 사줄까?" 냉큼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저 인간의 조롱에 속았다는 생각에 "됐어!"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가볍다. 됐다. 참관 수업은 끝났다. 이제 내겐 그것들이 필요 없다. 참관수업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