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매한 인간 Mar 04. 2019

29. 무인성이 진짜 무인성이었을까?

<무인성이 진짜 무인성이었을까?>


회사 동기 중 별명이 '무인성'인 언니가 한 명 있다. '무인성'의 의미가 인성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로봇처럼 무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이 딱 '무(無) 인성'이라서 별명이 붙었다. 무인성씨가 담당한 업무는 각 팀에서 올라온 온갖 예산 관련 보고서들을 검토하고 승인해주는 업무다. 출장비, 사무용품 구입비, 회의 진행비 등 예산이 안 들어간 문서는 찾기 힘들다. 그래서 무인성씨는 마우스를 잡는 오른쪽 손의 두 번째 손가락에 관절염이 왔다. 승인하고 반려하는 버튼을 하루에도 천 번 이상 누르니 관절염이 안 올 수 없을 것 같다.


문서를 반려당한 팀에서는 곧장 무인성씨한테 전화를 건다. 지금 사업 진행한다고 바빠 죽겠는데 왜 문서를 반려했냐고 따지기 위함이다. 무인성씨는 일관된 목소리로 조목조목 설명한다.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 대비 회의 진행비를 높게 책정하셨어요. 사무용품도.." 무인성씨의 일관된 목소리는 화낸 사람을 역으로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다행히 '동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번 덕을 본 적이 있다. 계산 실수로 총액을 틀리게 적거나, 예산 비목을 잘못 잡았을 때 무인성씨가 남 모르게 여러 번 고쳐줬다. 무인성씨가 있어서 회사 생활, 참 할만했다.


그런 무인성씨는 나보다 몇 개월 앞서 퇴사를 한 퇴사 선배가 됐다. 입사 경력 대비 엄청난 강도의 업무를 맡았던 무인성씨. 책임감을 갖고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먼저 지쳐서 그만두게 된다. 달리는 기차에도 열을 식히는 쉬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도 무인성씨는 더 열심히 일하라고 팀장님께 채찍질당했다. 결국 그 기차는 과도한 열로 터지기 직전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무인성씨는 그 용광로같이 뜨거운 기차를 뛰쳐나갔다. 온몸에 타들어가는 화상 자국을 남긴 채.


오늘 이 무인성씨가 카페에 방문했다. 무인성씨는 매일 새벽마다 요가를 다닌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에서 촤르륵 광이 난다. 무인성씨는 우리 카페의 밀크티를 가장 좋아한다. 진한 홍차 맛과 향이 우러난 밀크티가 딱 입맛에 맞다고 한다. 무인성씨는 같이 온 친구와 밀크티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무인성씨는 친구에게 근황을 묻고, 친구는 무인성씨의 하루 일과를 묻는다. 둘은 이제 지난 추억들을 읊조린다.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무인성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힘껏 웃는 얼굴에는 발그레 홍조가 피었다.


무인성씨는 진짜 무인성이었을까? 회사 사람들은 무인성씨가 저렇게 어린아이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걸 알까? 회사 사람들은 무인성씨가 저렇게 에너지 넘치는 사람임을 알까? 회사 사람들은 무인성씨가 저렇게 하이톤으로 신나게 이야기하는 걸 알까? 나도 비록 회사에서는 무인성씨의 진면모를 못 봤지만, 내가 차린 이 카페라는 공간에서 무인성씨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좋다. 그냥 마냥 좋다.


(무인성씨는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28. 선물 받은 봄이 꺾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