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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r 03. 2019

28. 선물 받은 봄이 꺾였다.

<선물 받은 봄이 꺾였다.>


오늘도 카페 문을 열었다. 오전부터 계속 열어뒀는데 손님은 통 없다.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책도 읽으면서 열심히 시간을 때워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단골손님이 들어오신다.


"엄마!"


텅 빈 카페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자니 우울했는데, 엄마 얼굴을 보니 반갑다. 나의 오늘의 첫 손님이자 단골손님인 엄마의 주문을 받았다. 따뜻하게 우유를 데우고, 에스프레소를 넣은 카페라테를 엄마에게 들고 갔다. 엄마는 들고 온 큰 검은 봉지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화분이다. 화분에 심긴 꽃이 시선을 뺏는다. 샛노란 잎이 방울방울 달려 있다. 파르르 떨리는 방울들이 묘한 모성애를 자극한다. 생각해보니 카페에 선인장, 스투키 같은 초록 식물들은 있는데 꽃은 없었다. 초록색 식물들 사이 노란 망울의 꽃은 도드라졌다. 노란 꽃잎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다. 봄이 왔구나. 봄. 나는 엄마에게 봄을 선물 받았다. 


잠시 뒤, 봄의 따스한 기운 덕분일까 손님이 오셨다. 네 명이나. 오늘은 유치원이 쉬는 날이라고 어머님 두 분과 꼬꼬마 숙녀 둘이 왔다. 꼬마 숙녀들은 테이블에 앉아서 가져온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서로의 그림을 보여주며 키득 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천사 같던지. 곧 날아갈 것 같이 귀여웠다. 잠시 뒤 그림 그리기가 지겨워졌는지 카페를 뛰어다닌다. 날기 위한 발 돋움을 하려는 건가? 다행히 다른 손님들도 없고, 행복해하는 두 천사들의 모습을 보니 말리기도 애매했다. 어머님들은 그동안의 육아에 지쳐서 수다 삼매경이었다. 그동안의 노곤함이 커피 한 잔에 사르륵 녹는 기분인가 보다. 두 분도 그렇게 아이들과 같이 여유롭고,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셨다.


카페를 시작하기 전 노키즈 존(No Kids Zone)이 확대된다는 뉴스를 접하고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여기저기 다 노 키즈존이라는데 어디를 갈까? 여기저기 다 눈치를 주며 '맘충'이라고 불러대는데 어디를 갈까? 나 마저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싹 사라진다. 이러니까 출산율이 줄어들지. 그런데 뭐랄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웃음만 나왔다. 떨어진 크레파스 조각이 의자에 긁혀서 바닥에는 흰색과 빨간색의 줄이 사방팔방 그어져 있다. 스케치북을 뜯으면 나오는 종이조각들이 난방기의 바람에 나풀나풀거린다. 뭉텅이의 냅킨 더미와 물티슈 무덤. 아이들에게 음료를 따라주기 위해 받아간 종이컵 2개 안에 가득한 찢긴 쓰레기들. 뭐, 치우는 거야 자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청소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마저 든다.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할 일이 생겨서 오히려 기쁘다.


그렇게 하나하나 치웠다. 마지막으로는 바닥을 닦을 차례가 되었다. 바닥에 쭉 그어진 크레파스를 따라가며 닦는다. 크레파스의 끝 지점을 보니 화분이 보인다. 엄마가 오늘 주고 간 노란 봄을 닮은 화분. 그런데 얘가 그 잠깐 사이 가을이 되어있다. 샛노란 방울들은 화분받침에 눈을 감고 잠들었다. 방울들 옆 기다랗게 뻗어있는 초록 잎들도 뜯겨나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렇게 선물 받은 봄이 꺾여있었다. 아,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다. 나무의자에 포크로 흠집을 내놓아도, 바닥에 음료를 내동냉이 쳐놔도, 접시를 깨뜨려도, 소품을 망가뜨리거나 몰래 가져가도 괜찮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아직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거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꽃이 꺾이니까 지금까지 참았던 마음들이 울컥하고 쏟아져 나온다. 내 마음속 폭풍우가 몰아친다. 봄은 순식간에 가을이. 가을은 그렇게 내 마음에 겨울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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