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전성시대

대리십이 리더십을 이긴다.

by emily

일명 사기업에 다닐 때(공공기관 사람들은 업계를 그리 부른다) 사장님 별명이 '대리'인 곳들이 꽤 있었다. 이 회사 저회사에 '김대리', '이대리', '박대리'가 회사를 이끌었다.


왜 그분들을 '대리'라고 부를까?

'대리'는 사원으로 입사해 3~5년간 무리없이 일하면 얻게 되는 첫 직급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윗분들 말씀 잘 듣고 자신에게 부여받은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것이다. 보통 그들에게 회사를 이끄는 리더십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그 일을 성실히 잘 해내면 그뿐이다. 그러나, 항상 궁금했다. 왜 리더십이 요구되는 자리에 대리쉽(대리의 정신)이 알차게 찬 사람들이 차지하는가?


사람마다 자신의 장점이 다르고 어떤 사람들은 꼼꼼함이, 어떤 사람은 큰 그림을 보는 강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꼼꼼함이 강점이면서 큰 그림을 보고, 큰 그림을 보면서 꼼꼼함이 빛나는 수륙양용과 같은 사람들은 흔치 않다. 보통 특장점이 부각되어 봉변을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큰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주어진 일을 크게 보고 한 땀 한 땀 실수 없이 해내면 그 친구는 일 잘한다 소문이 난다. 스스로 할 일을 찾고 친절한 미소를 장착하면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인성도 좋다며 극찬을 받는다.

꼼꼼함이 빛나는 친구가 사회생활 1 단계를 넘어, 2 단계로 성장하기 유리하다. 목표(goal)보다 주어진 업무(task)에 집중하면 생존에 유리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사람들은 사원때, 대리때 하던 업무 스타일을 영원히 버리지 못하게 된다.


여러 회사에서 외국 MBA 취득자들을 차세대 리더 그룹으로 따로 채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학력 차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왜, 외국에서, 좀 좋은 학교에서 MBA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차세대 리더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가?

아마도 대리십이 리더십으로 연결되는 상황의 방지책 중 하나라고 예상해 본다. 처음부터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인재를 양성한다면, 꼼꼼한 리더와 큰 그림 보는 리더가 조화를 이뤄 조직의 발전에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가정아래 차세대 리더그룹을 따로 기는 것이 아닐지.

리더의 자리가 예약된 그들은 그 어떤 일도 길게 하지 않는다. 각 직책을 1~2년 정도 얇고 넓게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사원으로 시작하기 보다는 중간 관리자인 과장정도의 직급으로 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떤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엇이든 어설프게 아는 초특급 대리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끄는 사람들이 대리십 마스터들이기 때문이다.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뽑은 인재들도 끝내 더 다수를 차지하는 대리쉽에 젖은 이들에게 스며든다,


리더십도 대리십도 그 어느 것도 마스터 하지 못한 나는 직장 생활 내내 힘들었다. 대리때는 쓸데 없이 큰 그림을 봤고, 부장이 되었을 때는 쓸데없이 대리의 어려움을 운운했다. 실무부터 성장한 나는 대리 때는 이 세세한 일들이 왜 필요한지 나 자신을 이해시켜야 했다. 필요없는 일을 시키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내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업무의 목표부터 들여다보곤 했다. 목표를 들여다보면, 더욱 더, 그 일의 필요성이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맹점이 있긴 했다. 부장이 되고 나서, 절대로 필요없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겠다 결심했지만, 나의 결심은 자주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끝내 내가 만족시켜야 하는 분들의 특징이 대리쉽이 가득한 분들이므로...


경영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우리의 세상은 적어도 밥 벌어먹고사는 세상은 세세한 것만 보이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현실이다.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어떻게 생존할까?

글쎄... 알아서 해야 한다.

내 잘난 맛에 살 것인지 그래도 적응하고 살 것인지도 나의 선택의 몫아닐까.

웃프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인 걸로.

대리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사장은 필요 없으므로.


#대리십 #먹고살리즘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