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15<초콜렛도넛>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초콜렛 도넛은? 너무 달지 않나? 칼로리는? 치아에 안좋을것도 같다. 단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초콜렛도넛이라면 왜인지 입에 넣기 조금 망설여진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인 달콤함이랄까? 용기를 내 한 피스를 입에 넣어본다. 역시나 너무 달다. 나완 달리 아는 학교 후배는 누텔라 한통을 밥숫가락으로 떠먹으며 순식간에 끝을낸다. 초콜렛 도넛을 본다면 아마 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먹을것같다. 이렇듯 우리는 한가지 음식을 통해서도 취향, 입맛, 생각의 극명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영화 <초콜렛도넛>에도 두가지 상반된 시선이 존재한다.
"도넛은 독이야."
마약중독자인 엄마가 경찰에 체포되자, 마르코는 혼자 방에 남는다. 이웃이었던 루디(알란커밍)는 불쌍한 마르코를 방에 데려온다. 배가 고픈 마르코가 제일 먹고싶은 음식은 다름아닌 '초콜렛 도넛'.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루디는 도넛은 건강에 좋지않다며 단숨에 마르코의 말을 무시한다. 그리곤 먹다 남은 치즈와 크래커를 건넨다. 물론 도넛은 건강에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도넛을 달라고 한다면, 망설여질것같다. 혼을 낼 것 같기도 하다. 도넛은 설탕덩어리니까, 건강에 안좋으니까, 이미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고 이젠 상식이니까 당연히 그래서는 안된다. 이 설탕덩어리에 대한 일방적인 생각은 선입견으로 똘똘뭉쳐진 기성세대, 보수주의, 영화속에서 당시 우월한 백인 미국인들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태도로 이어진다. 이보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시선은 없다. 멸시와 증오는 말할것도 없지만, 게이들이 부모를 맡겠다는 모습을 가증스럽고 한심하게 바라보는 정의와 공평의나라 미국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란. 그뿐만이 아니다. 아동국에서 납치하듯이 마르코를 데려갔고, 감옥같은 곳에 아이를 방치해둔채 최고의 복지국가시스템을 갖춘척 하는 모습이며,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척하며 재판에서는 게이부모의 행동거지만 물고 늘어지는 법조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은 또 어떠한가. 도넛이 몸에 안좋은걸 너무나 잘 알고있듯이, 그들은 오만하기만한 자신들의 행동이 옳다고 너무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과한것이 하나 있다. '초콜렛 도넛'은 너무 맛있다. 적어도 마르코 한테는 그랬다.
아이들의 입장은 어떨까? 달콤한 초콜렛과 도넛을 한꺼번에?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을까? 마르코를 보라. 바라만 보아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던가? 그는 순수하게 도넛을 사랑하고 두 아빠를 좋아하며 누구보다 그들과 같이 살기를 희망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몸에 안좋을지라도 달콤한 디저트를 몰래 주머니속에 넣어 줄것만 같다. 많은 아빠들이 엄마 몰래 아이에게 그러하듯이 말이다. 루디와 폴(가렛 딜라헌트)은 누구보다 좋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있었고, 잘 해오고 있었다. 어른들의 선입견과 오해를 배제한채 순수하게 아이의 의사만을 존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잘 못된걸까? 아이를 위한 재판이 아니었던가?폴과 루디는 모두 패소하고, 마약중독자였던 엄마가 가석방되면서 마르코를 찾아올수있는 방법은 없어졌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온 그날, 어김없이 마약을 하고, 낯선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려했다. 거슬리는 마르코를 복도로 쫓아냈고 진짜 집을 찾아 방황하던 마르코는 3일이 지난후 다리밑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폴은 아무도 신경쓰지않던, 하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했던 한 아이 '마르코'의 이야기를 그토록 격렬히 그들이 가족이 되기를 방해했던 판사,검사,변호사들에게 전달한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읽는 그들. 진짜 슬프긴 한걸까. 이럴줄 몰랐던 것일까.
그들은 마르코가 초콜렛도넛을 제일 좋아한다는걸 알긴 했을까? 사실 이 영화는 조금 더 달콤할 줄 알았다.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마르코처럼 나도 유난히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든 배신감이란 이로 다 말할수 없었다. 살만찌고 맛은 없는 달지않은 초콜릿 도넛을 먹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