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후각의 미디어다.
내가 대학생이던 1990년대엔 디자인 서적을 구입하려면 책 아저씨-보따리 장사와 비슷한 판매원-를 통해야 했는데, 차에 가득 책을 싣고 다니며 학교내 건물 로비에서 수입 서적을 판매하곤 했다. 대부분이 서점에서 취급하지 않는 해외 서적이었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나는 서지정보를 찾아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책 아저씨의 많은 책들 중 신간을 찾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처음 펼쳤을 때 페이지가 뻣뻣하고 냄새가 강할수록 따끈따끈한 신간이었다. 코를 찌르는 시큼하고 매운 냄새는 ‘저는 인쇄소에서 막 도착했답니다’ 라고 외치는 신호였다. 그 화학적 냄새는 새로운 정보를 갈구하는 나의 기대와 융합해 기분 좋은 설레임의 향기가 되었고, 지금도 그림이 가득한 페이지를 넘기면 풍겨나오는 날 선 푸른색 냄새가 좋다.
종이의 종류나 가공법, 인쇄의 면적에 따라 냄새는 다양하다. 아트지에 인쇄된 책은, 주로 미끈하고 날카로운 냄새가 강하다. 아트지는 가공할 때 접착제에 혼합한 재료를 종이 면에 바르기 때문이다. 덧바른 표면은 컬러 재현이 우수해 도판이 많은 책에 주로 사용된다. 사진과 이미지가 많아지면 도포할 잉크의 양도 많아지거니와 아트지는 잉크의 흡수율이 낮기 때문에 냄새가 강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모조나 표면의 가공이 없는 종이들은 조금 더 온화하다. 잉크 냄새만이 페이지 사이에서 살짝 풍겨날 뿐이다. 하지만 표면처리가 없는 비도공지는 냄새가 빨리 휘발된다. 새것인 시절이 짧다고나 할까.
싱싱한 책들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바래고 변한다. 지금 내 방은 대학 시절부터 끌고 다닌 책들이 쌓인 탓에 먼지와 햇빛과 시간이 스며들어 묵은 된장처럼 숙성된 냄새가 난다. 종이가 햇빛을 만나면 갓볶은 현미같은 고소함이 베인다. 오랫동안 연구실을 지켜온 연세 있으신 교수님들의 방에는 더 깊이 있는 냄새가 나는데, 부산 보수동 책방 거리 고서점의 따뜻하고 다정한 책 향기와 흡사하다. 겹겹이 쌓인 중첩의 시간이 활자와 함께 어우러진 공기가 빵장인이 만든 크루아상처럼 바스락하고 향기롭다.
그러고 보면 책이 많은 장소라고 해도 공간마다 냄새가 다르다. 고서점, 도서관, 인쇄소, 대형서점, 독립서점, 도서총판은 공간마다 고유한 냄새가 있다. 인쇄소는 제일 푸르고 맵다. 고서점은 연겨자 색의 구수함이다. 도서관과 큰 서점에도 차이가 있다. 도서관 문을 통과하면 나는 묵은 책 향기는 커다란 공유지식이라는 은유로 우리를 압도한다. 과거의 깊은 지혜의 향기라고나 할까. 이에 반해 대형서점의 냄새는 늘 새로운 신간들로 넘쳐나기때문에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메타포로 코를 자극한다. 책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고서와 신간, 각각의 것이 나름대로 혼합된 형태를 책 냄새라고 정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K문고에서는 'The Scent of PAGE'라는 룸 스프레이를 판매하는데, 서점 시그니처 향이란다. 맡아 본 적은 없지만, 책 냄새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지 검색해보니 품절이다. 책 냄새를 만든 조향사는 고서적 냄새, 새 책 냄새, 인쇄 냄새, 가공된 책 냄새를 면밀히 조합해 서점에 딱 맞는 책 향수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분이 있다면 한번 가서 의뢰해 보고 싶다. 고서적과 새것이 적절히 조합되고 잉크 냄새가 톡 쏘는 멋진 향이 나오지 않을까?
우리 서점에도 고유의 향기가 있다. 시고 달고, 오래되고, 신선하고, 퀘퀘하고, 고소하다. 내가 출근하면 내려 마시는 커피향이 책냄새와 섞이기 때문이다. 커피도 원두의 종류와 볶은 정도, 신선함에 따라서 향이 다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예가체프의 새콤하고도 고소한 커피향이 테이블과 책장의 책들 위로 내려앉으면 그때서야 완성되는 그윽한 향기가 바로 우리 서점의 시그니춰 향이다. 책냄새와 커피향은 요즘 말로 찰떡이다. 커피향과 함께 하는 책은 눈이 아니라 코로 읽는 후각의 미디어다.
아참, 좋은 냄새로 후각을 자극하면 판매량도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요. 고소한 빵냄새, 커피냄새는 손님의 지갑을 열게한다는 군요. 하지만 우리서점에서는 커피는 팔지 않는답니다. 반가운 손님께 대접할 공짜 커피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