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중요성, 일기의 중요성
곰곰이 떠올려보면 늘 어떠한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기록 저장소를 운영한 지도 어느덧 햇수로 3년 차. 이쯤 되니, 어느 기록들에는 많이 익숙해졌고 그래서 무료하게 느껴지는 기록들도 생겼다. 핑계를 내세우며 어영부영 기록하는 일이 몇 번 생기자, 마음에 들지 않는 기록을 저장한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상해 한동안 기록하는 것을 멈추기도 했다. 다른 기록들은 멈춰도 일기만큼은 멈추지 않았는데, 하루에 10분, 5분, 3분 동안의 그 끄적거림들이 나를 가장 많이 다독여주었기 때문.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일기의 내용이 아니라 시간 때문일 겁니다. 마치 수령이 몇백 년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 아래 섰을 때나, 시간의 침식 작용으로 이뤄진 절벽 같은 것을 바라볼 때 느끼는 기분과 흡사한 것이죠. 오랫동안 한 자리에 쌓여온 시간에 감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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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 역시 처음에는 대수롭게 않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별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고, 그냥 내가 보낸 하루를 짤막하게 적어두는 것 뿐이라고. 사실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위로 시간이 쌓인 겁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누군가는 적어서 남겨두고 누군가는 흘려보내는 바로 그 시간요. 시간이 쌓인 기록은 사실 그게 무엇이든 귀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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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일기야말로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부치는 엽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나는 이런 일로 웃었고, 이런 것을 먹었고, 이런 사람을 만나 이런 길을 걸었다고 미래의 나에게 알려주는 일입니다. 미래의 나도 부디 괜찮기를 바란다고 안부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출판사, 2022, p.22~p.23
아침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저녁엔 잠에 들락 말락해서, 늘 비몽사몽한 정신에 쓰는 글임에도 그런 글이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 준다니 새삼 신기하지 않은가. 가끔 펜을 몇 번이나 고쳐 쥐어도 도저히 날짜 밑에 그 어느 철자도 쓰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는 앞에 쓴 아무 일기나 무작정 펼쳐서 문장들을 곱씹고는 하는데, 그 일기를 쓰는 나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한 번씩 놀란다. 어떤 글들은 이런 속 이야기까지 적어두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솔직하고, 어떤 글들은 평소의 나답지 않게 감정에 치우쳐서 웃기기도 하다.
글도 이렇게 쓰면 되는 건데. 늘 잘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나의 내일을 붙잡는다. 굳이 애쓰지 않고 나의 마음을 담아내는 일기처럼, 글을 쓸 때도 ‘지금보다 덜 부담 갖고 덜 애쓰면 조금 더 자주 나다운 글을 퍼낼 수 있지 않으려나..’ 하고 언젠가 다시 할 도돌이표 같은 고민을 잠깐이라도 접어두자고 스스로를 설득해 보는, 어느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