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쑥떡을 빚던 햇살

산문-1

by 이종희

찹쌀 쑥떡이 대바구니 석작에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면 봄이다


볼을 에일 듯한 바닷바람이 눈에 띄게 가라앉습니다. 마당 건너 낮은 언덕에 빼곡하게 서있는 동백나무에서 점점 붉은빛이 새어 나옵니다. 멈춰있던 계절의 흐름이 구정 설 명절을 앞두고 풀린다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황토마당 멍석 위에 널찍한 나무 떡판이 놓이고, 엄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마솥에서 이제 막 떼어낸 옹이 시루를 들고 나와 찰밥을 퍼냅니다. 그 위에 다시 삶아 물기를 뺀 쑥을 올려놓으면서 "쿵덕쿵덕" 어른들의 떡메 치는 소리가 돌담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공중에서 내려온 떡메가 빈 떡판 귀퉁이로 비켜주면, 찬물에 넣었다가 빠져나온 엄마 손에 이끌린 쑥찰밥 덩이가, 질척이는 몸을 뒤척여 간신히 돌아눕습니다. 이런 반복 과정을 거치고, 떡은 콩가루 위에서 나른해집니다.


납작 펴진 채로 뚝뚝 잘린 쑥떡은 콩가루 말이를 합니다. 찰기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을 때, 비로소 쑥떡은 네모난 쟁반 위에 가지런히 모일 수 있습니다.


어느덧 설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이 지났습니다. 양지바른 밭두렁에 아기 손바닥만 한 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른바람의 날들을 거친 쑥떡은 콩가루가 털려 속살이 훤히 드러나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금이 가 있습니다.



그쯤 되면 쑥떡은 얼마 남지 않은 채로 처마 안쪽, 대롱대롱 매달린 네모난 석작 대바구니에 있다가 식구들이 다 모인 날이면 내려옵니다.


군불을 피우고 잉걸불을 만들어 쑥떡을 석쇠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습니다. 잉걸불의 강도에 따라 떡이 뒤척이는 시간이 정해집니다. 짙은 갈색으로 부푼 자리는 숟가락으로 쓱쓱 긁어 털면 떨어져 나갑니다.


잘 구워진 쑥떡을 우리들은 설탕에 듬뿍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하고, 아버지는 엄마가 오랜 시간 고아 만든 고구마 조청에 찍어 먹기를 좋아합니다. 딱딱한 껍질은 고소하지만, 살아있는 찰밥 알갱이 덕분에 씹는 재미가 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사 남매 모두 짝을 만나 떠났습니다.

고향에서 명절을 쇠고 첫 배를 타고 먼 도로를 달려가는 오빠 편으로 엄마는 늘 묵직한 박스를 보냅니다. 음식이 상할까 봐, 한밤중에 깨어나 냉장고를 비웠을 엄마가 생각나 박스를 풀다 말고 엄마께 전화를 합니다.


"네 집 나누고 보니 얼마 안 된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라"


도대체 엄마는 음식을 얼마나 하길래, 이렇게 많은 음식을 부치는 걸까요..... 엄마의 고생을 가늠하기도 전에 반가운 쑥떡 뭉치가 보입니다. 예전처럼 떡방아를 찧어 만들지는 않지만, 떡을 만들기 위해선 새벽부터 불린 쌀과 쑥이든 대야를 이고 솔바람이 달려오는 산길을 걸어야 합니다.



먼 길 걸어 방앗간이 있는 안도에 도착해 보면 명절을 앞둔 터라, 수많은 대야가 방앗간을 빠져나와 두몽안 바다가 넘실거린 길 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도 하늘에 주홍빛 물이 들때서야 엄마는 이야포 구름다리를 스쳐 다시 산길을 오릅니다.


지금도 쑥떡만 보면 아린 진물이 마음 안쪽에서 흘러나옵니다. 그 질기고 질척이는 사랑을 저는 영영 갚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밀려든 그늘이 꽃샘추위를 몰고 와도, 살아 숨 쉬는 날들을 예쁘게 가꾸어가야겠습니다. 내리내리 안겨주신 엄마의 보드라운 햇살을 기억하면서......



*안도.이야포.부도,두몽안은 [여수시 금오열도]에 속해있는 지명


프롤로그 [섬마을 동화]

비렁길로 유명한 그곳은, 크고 작은 다양한 섬이 조화를 이루어 금오열도가 되었습니다. 그 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그 섬을 떠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는지 깨닫습니다.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도 새랍(대문)만 나가면 가슴을 뻥 뚫어주던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그 바다에서 불어오는 숱한 바람을 막아주던 돌담이 있었습니다. 그 안의 잔잔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합니다. 스토리 詩를 접목한 섬마을 동화가 어떻게 밖으로 나올지 저 자신도 사뭇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