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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tuti Jan 14. 2020

1화: 학군, 학원. 미국엔 그런 건 없을 줄 알았다.

미국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교육 방법 이야기 

1999년 여름, ESL 수업을 들으러 썸머스쿨에 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를 벋어나 다른 학교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그 시절, 전날 밤 차에서 지도책을 가져와 미리 가야 할 학교를 찾아 지도책을 이리저리 넘기며 운전해서 가야 할 길을 꼼꼼히 메모했다. I-95/395N--> I-495N-->I-50W...

50분가량 운전 해 한 번도 가지 못했던 동네에 있는 하이스쿨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썸머 ESL 수업은 레벨에 상관없이 모두 두 반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40명이 넘는 학생이 큰 교실에 책상을 빡빡하게 넣어 앉았다. 선생님이 지도해야 하는 아이들의 숫자를 보고 사뭇 당황하시는 눈치였다. 미국에선 아무리 큰 수업이라 해 봤자 25명을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히 우리 학교 ESL 수업엔 각 레벨별로 10명이 체 넘지 않은 소수 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카운티의 여러 학교가 모여 큰 반이 된 만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선 한국 학생이라곤 학교 전체에 불과 대 여섯 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날, 그 수업에서만 4명의 한국 아이들이 있었고 점심시간, 그들을 통해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한국 아이들과 함께 앉아 점심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없이 차를 가지고 등 하교를 하는 나는 다른 친구, 동생들을 집에 갈 때 라이드 해 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 한 시간가량 이리저리 동네를 돌아 도착할 것을 내가 집에 가는 길에 라이드를 주면 친구들은 20-30 분 만에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형제 초청으로 이민을 온 우리는 우리를 초청 해 주신 고모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 에서 가까운 Fairfax County는 미국 전역에서 공립학교 성적이 좋은 것으로 유명해 어느 학교를 다니든 다 비슷하고 언니들이 졸업한 Edison High School은 Full- IB Program이 있어서 언니들은 다들 그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교 2학년으로 동부의 명문대 UVA에 입학해 3년 만에 대학을 졸업을 했다. 미국 이민생활을 20년이나 하신 고모님의 말씀은 우리 가족에겐 미국 생활 백과사전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한인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 시절 막 미국에 도착한 한인 친구들은 각각 사정이 달랐겠지만 대부분 IMF 이민자의 자녀들이었다. 부모님들은 한국의 명문대를 졸업해 대기업에 입사해 좋은 위치까지 올라갔으나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탓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명퇴를 해서 퇴직금을 챙겨 미국에 이민 온. 그 들의 친인척이 20+년 전 그들을 초청 이민 신청을 해 주어 미국으로 올 수 있게 된 아주 타이밍이 딱딱 떨어진 럭키같은 부류도 있었지만, 망해가는 한국을 바라보며 한국에서의 돈을 탈탈 털어 일단 먹고살려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고, 교회에 다니는 신심이 깊은 분들은 목사 공부라는 걸 핑계로 한국 교회의 지인과 연결해 선후배 관계에 엮기고 엮여 삶의 터전을 옮겨 미국으로 오신 분들이셨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미국에 오셨던 그 궁극적인 이유의 끝은 자녀들의 미래 - 곧 자녀교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와이트 컬러로 단 한 번도 굳은일이라곤 해 보지 않은 아빠들이 40대 후반-50대 초반의 늦은 나이에 무거운 짐을 옮기고, 더러운 걸 만지고, 안 되는 영어로 손짓 발짓을 써 가며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밖에선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엄마들이 식당 설거지를 하고, 남의 가게 청소를 하며 애들이 하루빨리 영어를 배우고 대학을 졸업해 그저 20년 먼저 와 자리를 잡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업신여기며 거지 취급하는 친척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으면 하며 이를 갈고 일을 했다. 그 시절 아이들은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바꿔진 부모님의 삶을 곁에서 보고 친척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자신도 모르게 일찍 철이 들었다.  인생에서 가장 불안정한 감정과 여린 감성을 가진 십 대 시절을  그들은 문화적인 차이, 경제적인 차이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 짧은 시간 내에 성적을 내고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서 버텨내며 하루하루 자신을 더 단단히 다져야만 했다.  


나와 함께 점심을 먹던 아이들은 대부분 옥튼, 메클린, 첸틀리 하이스쿨을 다녔다. 그곳은 Fairfax의 강남 8 학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아파트 가격이 최근 급상 한 곳이었다. 좋은 학군이라는 소리에 한인들이 몰려 아파트 자리가 나지가 않을 정도로 한인들의 선호도가 높은 학군이었다. 한인뿐만이 아니었다. 똑똑하고 공부 잘했던 한인들의 자녀는 학교 수준을 올려 놓았고 교육열이 높은 백인들이 그쪽 지역을 선호 해 새로 지은 타운하우스를 찾아 입주하고 있었다.

한 동생이 물었다. 

"누나는 어느 학교 다녀? " 

" Edison" 

"어 그거 흑인 학교 아니야?"

"아닌데... 흑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 흑인만 다닌다는 게 아니라 워낙 미국에 갓 도착한 유색인종이 많이 다니니깐 학교 안 좋다고 흑인 학교라고 부르잖아. 공부 분위기 망친다고. 거기 실업계 고등학교 아니야? 직업교육 가리키는. 왜 누나 부모님은 거기로 학교를 정했데?"

"어... 그래?? 우리는 그냥 고모가 거기 근처 사셔서... 우리가 처음에 고모집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나갔으니깐..."

"고모집에서 나왔다는 건 고모랑 부모님이랑 트러블이 있었다는 건데 어차피 고모집에서 나가서 아파트로 이사 나갈 꺼였다면 학군 찾아서 나왔어야지. 고모랑 매주 얼굴 보고 지내려고 근처로 이사 간 건 아니잖아."

"그... 그렇지...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Edison High School은 Route 1 옆에 있는 10-15층 고층 아파트들을 학군으로 포함하고 있고, 그 고층아파트 들은 (미국은 아파트의 대부분은 3층이다) 엘살바도르,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난민과 이민자들이 싼 가격에 머물 수 있는 저가 아파트들이었다. 이민자들이 많다 보니 ESL 수업은 5개 단계, 8개 반이 운영되고 있었고 학교 안엔 직업교육을 하는 Academy가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 미국에선 카운티 학교의 거점 학교에 직업교육을 하는 Academy를 운영해 다른 지역의 아이들이 2교시를 마치고 스쿨버스로 Academy에 와서 직업교육 훈련을 받고 자격증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목공, 미용, 제빵, 자동차 정비, 호텔경영, 아기 돌보미 등등 각종 직업교육 수업이 우리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 소위 공부에 관심 없고, 껄렁껄렁 한 문제아들, 영어를 잘 못하거나 대학 갈 생각이 없는 대부분의 유색인종인 학생들이 점심 먹고 느긋느긋 스쿨버스로 올라 타 우리 학교로 향했던 것이다. 그걸 본 상위 엘리트 백인 학생이나 교육 때문에 이민 온 한국인 가정의 학생들은 우리 학교를 흑인 학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경주에서 자라 뺑뺑이로 중학교를 가고 고입시험으로 고등학교를 갔던 내가, 부모님이 나의 교육 때문에 미국행을 선택해서 왔는데, 그런 미국 땅에 와서 좋은 학군을 따지는 문화를 경험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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