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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tuti Jan 14. 2020

2화: 내 나이 서른, 첫 집을 장만했다.


드디어 미국 생활 13년 만에 아파트 생활을 청산했다.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다시 살림을 합 후 8개월.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조금 받아 남편의 직장이 있는 클린턴에서 나와 근처의 조금 더 큰 도시, 낙스빌로 이사를 했다. 3살, 1살. 커가는 아이들에게 남의 눈치 안 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뒷마당이 훤희 내다 보이는 남향에 위치한 썬룸에는 볕이 잘 들어 따뜻함과 싱그러움이 함께 느껴지는 집이었다. 뒷마당 언덕엔 트렌치를 만들어 내가 어릴 적 아빠가 그러셨던 것처럼 텃밭을 가꿔보고 싶었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2012년 가을의 끄트머리, 미국 집값이 서프라이즈 모게지 사태 이후 계속 곤두박질쳐 바닥을 쳤을 그 시점, 우리는 2.875% 15년 fixed rate으로 집을 살 수 있었다. 집을 소개해 준 리얼터가 우리에게 말했다. 여름방학이 끝나서 이사 시즌이 끝나 좀 더 싼 가격에 집을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그때 그 말의 본 뜻을 알지 못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도시에서 자란 남편과는 달리 모든 편의시설이 30분 거리에 있길 바랬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남편 직장까지 약 30분 내외, 아이들 병원, Mother's day out(주 2회 어린이집), 월마트, 도서관, 은행, 관공서, 그리고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기로 한 시동생이 다닐 학교까지 모두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집을 찾았다. 특히 큰 딸이 다니는 Mother's day out은 차로 5분 거리에다 한 달 보육비도 120불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8개월 전까지만 해 나는 풀타임으로 일을 하 두 아이 양육비로 한주에 700불가량 내면서 내가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아이를 맡기는 데 쓰고 있었다. 거기다 남편과는 차로 10시간도 넘게 운전해야 하는 도시에 서로 떨어져 살고 있었다.


내가 직장에 다니지 않고아이들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는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살 수 있겠구나. 


곧 부자가 될 것만 같은 꿈에 사로잡혔다.


테네시 아주 작은 동네인 클린턴에는 초중고가 딱 한 개씩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앞엔 은행, 교회, 도서관, 커뮤니티센터, 약국, 햄버거 가게, 시청과 경찰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큰 딸이 다니던 교회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동양인은 우리 밖에 없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엄마가 소포를 보내주셨다. 잠시 내가 외출을 한 사이에 우체부가 왔다 갔다며 아파트 문에 스티커가 붙여져 있어 우체국으로 소포를 찾으러 향하던 길에 아파트 앞에서 우체국 트럭을 만났다. 트럭을 세워 한국에서 온 소포를 놓쳤다며 내 이름과 주소를 미쳐 말하기 전에 집배원은 나에게 소포를 전해주었다. 신분증을 제시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 동네에 이상한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쓰는 동양인은 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름 밤 드라이브를 하면 코너를 돌 때마다 헤드라이트에 화답하며 반짝거리는 반딧불을 볼 수 있고, 아파트 베란다에 심어놓은 방울토마토에는 책에서나 보던 벌새가 날아와 꿀을 빨아먹고 가는, 도서관의 사서와 이름으로 인사하고, 교회 핼러윈 행사가 동내 행사가 되어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는 그런 정감 어린 동네는 경주에서 나고자란 나에게도 이색적일 만큼이나 따뜻한 경험이었다.

 

반면, 서울에서 자라 뉴욕에서 대학 졸업한 남편은 시골생활을 힘들어했다. 교회에서 처음 보는 할머니에게 " 아, 나 너 알아. 너 저기 월마트 네일 샵에서 일하는 거 본 적이 있어." 하는 소리를 들은 남편은 동양인이라곤 본 적도 없는 촌구석에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미국이 최고라고 믿는 redneck, hillbilly 와는 같이 살 수 없다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 큰 도시의 학교를 보내야 한다며 낙스빌로 이사를 결정했다.

우리가 여태껏 살았던 도시들이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그래도 테네시에선 3번째로 큰 도시니깐.


이사를 가면 늘 그렇듯 교회를 정해야 했다. 모든 걸 30분 이내 거리 안에 있길 원하는 나로서는 1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가야 하는 예전 교회를 계속 다닌다는 건 옵션에 없었다. 특히 교회는 지역사회를 대표해야 한다고 믿는 나였기에 내가 사는 곳에서 사역을 하는 교회에 가길 원했다. 8개월 전쯤 남편과 살림을 합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 오게 된 나에게 남편은 한국교회를 가서 아줌마들을 사귀며 육아 스트레스도 덜고 수다도 떨라며 한국교회를 권했다. 한인이 별로 많지도 않은 이 지역엔 한국교회가 3개나 있었다. 장로교회 1개와 침례교회 2개. 내가 테네시로 오기 전 남편이 사전 답사를 했는데 장로교회는 마침 동성 간 혼인 same sex marriage 법으로 넘어가면서 게이 목사를 인정해 주냐 아니냐로 교회가 두 개로 갈라지는 과정에 있었다. 한인 장로교회가 미국 장로회 안에 소속이 되어 있으니 계속 미국 장로회에 소속이 되어 재정적 지원을 받으려면 게이 목사를 인정해야 했고 그걸 반대하는 반대파는 마침 남편이 사전답사를 하던 그 주에 모두 교회 출석을 하지 않은 참으로 민망한 시점에 남편이 주일예배를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좋지 않은 첫인상 덕분인지 아니면 거의 대부분이 박사, 대학원생, 교수들로 이루어진 한인 장로교회의 분위기 덕분인진 몰라도 둘 다 대학밖에 졸업하지 않아 가방끈이 짧은 우리들은 침례교회로 가기로 정했다. 인터넷으로 찾아 전화를 걸었는데 인터넷에서 우리가 찾은 그곳 주소가 아닌 다른 주소로 오라고 사모님이 일러주셨다. 나중에 주일예배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인데 몇 해 전 교인들과의 불화로 둘로 갈라진 침례교회가 경제적인 이유로(둘 다 미국 교회에게 교회건물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는 것이다. 교인 20가구 남짓한 교회에 목사가 둘이나 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세상이 예수쟁이들을 욕하는구나. 예수쟁이인 우리 부부는 서로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장로교회는 낙스빌 서쪽 경계에 맞닿아 있는 페러 것에, 우리가 간 침례교는 낙스빌 다운타운에서 30분가량 서쪽에 쇼핑센터 근처에 위치 해 있었다. 참 신기한 것이 장로교회의 대부분 신도들은 낙스빌 다운타운에 있는 대학교 교직원이나 학생들 또는 근처 오크리지 연구원들이었는데 한 시간가량을 운전 해  출퇴근을 하면서 그곳 근처에 살고 있었고, 침례교회의 대부분 신도들의 대부분 역시 클린턴에 있는 한국 자동차 업체의 직원들이었는데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하는 그곳 근처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 출신인 나에겐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한 시간 거리에 직장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건 경주에서 서대구까지, 울산까지, 포항까지, 영천까지 매일 출퇴근을 한다는 걸로 들렸다. 도대체 왜?? 하루에 2시간씩 운전하면 한 달에 기름값이 얼마야???


교회에서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오신 교수님 와이프와 친해졌다. 늦둥이 아들과 초등, 중등 두 딸이 있는 전업주부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편분의 교환교수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귀국을 앞두고 그동안 살던 짐을 정리하길 원하셨다. 두 딸들이 짧은 기간이나마 투터링(개인과외)도 하고 학교도 다녀 영어가 많이 늘어 가는 걸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한국에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이셨는데 여기선 친교 이유로 한국 사람을 만나러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니셨다. 주일 예배뿐만이 아니라 각종 행사에도 다 참가를 하셨다. 그분은 교회 건물 바로 건너편에 있는 2 Beds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집에도 놀러 가 점심도 얻어먹고 이야기도 같이 나눴다. 절약이 몸에 배신 엄청 검소하게 사시는 분이셨다. 한국에 건물이 있어 월세를 받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 저렇게 열심히 사셔서 부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존경심이 들었다. 아파트는 지저분한 낙서가 있는 벽에 오래된 카펫. 누가 봐도 업데이트를 전혀 안 해 준 티가 났다. 미국 아파트들은 다 월세라 아끼실려고 이런 곳에 사시는구나 하며 지례짐작을 했다. 예전에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오셔서 그 아파트에 살고 계시던 가족에게 아파트는 명의이전만 해서 들어오고, 세간살이는 통째로 구입하셨다고 했다. 한국으로의 귀국을 앞두고 그 동안 쓰시던 세간살이를 파실려고 노력 하셨다. 마침 한국에서 미국 대학원 유학을 생각하고 공부하고 있는 시동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시동생을 위해 그분들의 세간살이를 통째로 구입했다.


우리는 그분들이 이사 가시고 나중에야 속사정을  알았다. 이 지역에서 초중고 모두 좋은 학군을 찾기는 아주 힘든데 페 초중고가 낙스 카운티에선 가장 좋고,  그다음이 이 아파트가 위치한 지역이라는 것을. 이 아파트가 위치한 지역은 고등학교는 페러것 고등학교보단 조금 못하지만 초중학교는 페러 것에 비해 대등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이 두 지역은 인도, 중국, 한국인들을 포함한 교육열이 높은 이민자 가족들이나 upper middle class 미국인 가정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다. 심지어 각족 쇼핑센터와 학원, 사립학교들도 이 부근에 있었다.


그 교환교수가 살던 그 아파트는 웨이팅 리스트가 있어서 웬만해선 잘 들어가기도 힘들고 그 교환교수 부부처럼 세입자와 잘 알고 지내다 세입자가 나갈 무렵 부탁을 해 명의이전을 해서 들어가야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명의이전으로 들어갈 경우엔 업데이트를 해 주지 않으니 그전 사람도 그 그전 사람도 계속 그런 식으로 이사를 해서 들어왔으니 카펫도 낡았고 케비넷도 다 으스러져가는 체로 1년을 버티고 사셨던 거였다. 시큐리티 디파짓(보증금)을 이전 세입자에게 다 주고 자신은 다음 세입자를 찾지 못한다면 시큐리티 디파짓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좋은 학군에 아이들을 보낼 수 있으면 사람들은 그쪽을 선택했다.


도대체 한국에서 바로 오신 분들이 이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셨을까? 그분들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선배 교환교수들에게 정보를 받았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바로 온 주재원 가족들이나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이 지역에 대해 잘 알고 거주지역을 선택했을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동네도 학군이란 게 존재하는구나..... 그 사실을 알고 제일 먼저 인터넷에서 우리 집 학군을 검색해 봤다.

www.greatschools.org

초등학교 10점 만점에 5점

중학교 10점 만점에 3점

고등학교 10점 만점에 5점

헉. 대략 난감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애들은 아직 어리니깐.

3살, 1살 아직 학교 갈 시기가 많이 남았잖아.


사이트에서 학교를 클릭하면 그쪽 지역에 마켓에 나온 집들을 보여주었다.

슬며시 패러것 학군을 클릭해 보았다.

집값이 딱 2배였다.

클릭 한 번에 아름답고 따뜻했던 나의 첫 보금자리는 누추한 곳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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