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일간의 배낭여행 7. 그리스 로도스섬
홈쇼핑에 사표를 내고 두 달이 지난 후 로도스로 가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연서가 보낸 엽서 로도스 그림 연작은 온통 올리브나무들이다. 3년 전, 겨울 휴가에서 돌아와 받은 첫 엽서에는 로도스 동남쪽 절벽 위 린도스 성과 성의 광장 아테나 신전 벽 앞의 올리브 나무가 그려져 있다. 연둣빛 나무는 굳게 닫힌 성벽 앞에서 햇빛을 받고 은빛으로 반짝인다.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들이 나무 둥치가 기운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홀로 외로움을 견디는 모습이다. 오랫동안 기억으로 남은 연서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 김홍성 <린도스 성의 올리브나무> 중
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홍성 작가가 왜 올리브나무가 지천인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 중 로도스 섬, 그중에서도 린도스를 소설의 배경으로 선택했을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로도스는 내게도 특별히 와닿았던 섬이다.
마르마리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에 도착했다. 배로 국경을 넘는 낯선 경험이 설렜다. 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렸을 뿐인데 새로운 국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바람에 날리는 그리스 국기는 뭐랄까 튀르키예 국기보다 위엄 있게 자신을 봐달라는 듯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 바다에는 무수한 섬이 있는데 대다수가 그리스 영토이다. 그 많은 섬들 중 여행일정상 두 곳만 골랐고, 그중 하나가 로도스였다. 로도스섬 역시 그리스 본토보다는 튀르키예 소아시아 반도 쪽에 가까이 있다.
여행 시작전 출국을 앞두고 로도스의 산불 소식을 뉴스에서 접했었다. 섬 중앙 우림지대에서 난 산불이고 우리가 묵을 린도스는 해안가이긴 하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 예약해 두었던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에게 연락해서 안전을 사전 확인했다. 폭염과 건조한 날씨 탓에 그리스 전역이 산불 비상이었고, 나중에 하와이에서도 산불피해 소식이 뒤를 이었다. 이상 기후, 폭우, 폭설, 폭염, 지진, 홍수... 자연이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로도스를 선택한 것은, 도시 절반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중세모습을 간직한 박물관 같다는 로도스시티와 아크로폴리스 등 고대유적과 화려한 옛날 가옥들이 있다는 린도스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린도스에서 우리가 2박을 한 에어비앤비 숙소도 실제 1620년대부터 이어져온 가옥이었다. 400년 전 집들이 유산이 되고 세계인들이 찾는 관광지로 만들어 주었다니 멋진 일이다.
로도스섬은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섬이지만 유럽인들에게는 꽤 핫한 휴양지 같았다. 실제로 여름휴가철 한복판 우리가 머문 3일 동안 각국의 여행자들이 바글바글했지만 한국인은 전혀 보지 못했고 동양인도 중국인 가족 한팀이 전부였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가게 되더라도 튀르키예에서 그리스의 다른 섬들, 특히 산토리니를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고, 배시간 텀을 보내기 위해 한나절 정도 로도스 시티를 구경하는 루트가 일반적이다.
우리는 로도스시티는 산토리니로 출발하는 날 보는 것으로 미뤄 두고, 입국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린도스로 향했다. 로도스는 제주도 4분의 3 정도 크기의 섬이다. 그러니까 제주도로 치자면, 제주공항 혹은 제주항으로 입도해서 서귀포로 향하는 셈. 물론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배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성벽만으로도 로도스는 한 눈에도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섬으로 보였다.
튀르키예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처음 대면하는 나라로 넘어온 것이라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것 마냥 내 마음은 들떴는데, 하하의 상태는 그렇지 못했다. 배에서부터 멀미 얘기를 하면서 속이 울렁거린다며 힘들어했다. 멀리를 할 리가 없다. 더 어릴적부터 배낚시를 몇 번을 같이 갔는데.
여행이 지친 것인지, 어제 마르마리스 숙소에 작은 수영장이 있었는데 놀면서 깨끗하지 않은 물을 너무 많이 먹은 건 아닌지, 셀추크에서 먹은 케이크가 결국 탈이 난 것은 아닌지, 생각이 꼬리를 물며 걱정이었다. 숙소를 잡고 푹 쉬면 낫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았고 다음날 결국 설사를 하기 시작해 로도스에 머무는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7살 아이와 둘이 배낭 하나 둘러메고 40도에 육박하는 지중해 나라만을 골라 40일이 넘는 여행을 계획한 것 자체가 무모했을까. 이것도 내 욕심일까. 그런 생각들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준비해 온 상비약은 아이용으로는 감기약(기침약, 위장약, 항히스타민제, 해열제를 각각 별도로 포장)과 지사제, 그리고 연고와 밴드 등 외상처치용품이었고, 내 걸로는 정로환, 종합감기약, 타이레놀이었다. 머리가 계속 아프다고 해서 성인용 타이레놀은 6등분해 먹이고 설사가 계속되어 지사제를 먹였다. 아주 처지는 것은 아니어서 해수욕장도 가고 아크로폴리스도 갔는데, 날이 더운데 설사를 하는 경우 수분보충을 제대로 안 해주면 큰 위험이 따를 수 있어서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아크로폴리스 하면 대부분 아테네를 떠올리는데 아크로폴리스는 고유명사는 아니고 고대도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언덕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대부분은 중심지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처음엔 폴리스라고 부르다가 도시국가 자체가 폴리스라 불리게 되면서 형용사 acros(높은)를 불여서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 신전을 세워둔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높이 있으니 전쟁 때에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린도스에도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거기에 아테나 신전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와 아래 주거공간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그리스 고대 도시의 모습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가 이번 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린도스 아크로폴리스도 방문했다. 어른 12유로 어린이 6유로.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면 독특한 양식의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린도스 비치도 보인다. 그리고 김홍정 작가 소설의 상징적 소재인 올리브나무가 있다.
린도스는 기원전 10세기 경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화와 역사가 어우러져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옛 도시인데, 이제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저녁이 되면 골목은 사람들로 숨이 막힐 것 같고,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시간여행의 길은 인간의 상술에 혹사당하는 당나귀들로 어지럽다. 그런 것들이 이 특별한 섬을 평범한 관광지로 만들고 있는 듯해 안타까웠다.
린도스 해수욕장은 작지만 아이들과 놀기에는 백 점짜리다. 물도 맑고 얕은 물이 한참을 이어진다. 하하랑 갔던 해수욕장 중에서는 아이에게 안전하고 깨끗한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신안 자은도의 백길해수욕장이 최고로 좋았고, 규모는 작지만 그다음은 여기도 꼽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아픈 것도 잊고 오후까지 신나게 놀더니, 하하는 숙소로 오자마자 다시 아프다고 했다. 다음날에는 15시 배로 산토리니로 가야 하고 그전에 아침 일찍 움직여 로도스 구시가지를 봐야 하므로, 오후를 그냥 숙소에만 머물 수가 없어서 아이는 쉬라고 하고 혼자 동네를 돌아보고 사진도 찍었다.
숙소에 주방시설이 있길래 하하에게 누룽지를 만들어주려고 ABC마트를 찾아갔는데 맙소사 마트조차 이렇게 이쁠 일인가. 정말 예쁜 마을이다, 린도스는. 그렇지만 아이와 둘이 하는 여행인데 아이가 힘없이 쳐지니까 린도스의 전통가옥들도 골목마다 아기자기 멋진 기념품들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대로 아침 일찍 린도스시티로 출발하지 못하고 일정을 조정해야만 했다. 아이를 충분히 재우고 버스를 탔고, 배시간에 쫓겨 린도스 구시가지를 여유 있게 보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일이 되었다.
린도스를 떠나기 전 마트를 찾기 위해 숙소 호스트에게 길을 물어보았을 때, 워낙 마을길이 전부 골목길인 데다가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까 친절하게도 직접 나와 함께 나서주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하는 식의 스킨십을 하는 것이 아닌가. 불쾌하기도 했고 겁도 났던 나는 강한 어조로 만지지 말라고, 절대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그 주인을 마주쳤을 때 그가 오해하지 말라며 이야기하는데 대충 알아들은 그의 설명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거였다. 얘기를 듣다 보니 떠올랐다. 그리스식 인사는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읽은 기억이 났다. 생각해 보니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그 호스트는 가게에 오는 마을사람들과 볼을 대는 방식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좀 민망해졌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돌아와 하하에게 얘기해 주었더니 하하 왈
"아이고 엄마!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셔야죠. 사과는 분명히 하신 거죠?"
그렇지만 그곳을 떠나 산토리니나 아테네로 가서는 그리스식 인사를 본 기억은 없다. 우리로 쳐서 말하자면 린도스가 사람과의 정이 더 푸근하게 남아있는 시골동네 같은 곳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