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빚은 엄마의 찰떡
보자기에 쌓인 찰떡과 함께 먼 친척 이모집으로 어린것이 들여 졌다. 비둘기행 기차안에서 엄마와 나눈 얘기는 기억에 없다. 설겅설겅 씹히던 녹두 찰떡의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찰떡이 어머니의 눈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엄마에게 하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흰머리 성성한 두 모녀가 녹두 찰떡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이다.
없는 살림에 자식 여섯을 키우자니 힘이 들었단다.
갯벌에서 나온 모든것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했던 엄마였다. 가는 칼끝으로 바지락과 굴을 까던 조막만한 손에 검버섯이 끼고, 가는 줄이 지글지글 해지니 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모진 세월을 미워했었다. 엄마의 바위같은 성정과 과묵함이 싫었다. 나를 기어이 공순이로 만들었다는 그 사실에 꺼이 꺼이 울었다.
아버지 몰래 국민학교 4학년 짜리 벌거숭이를 미국으로 보내려 했던 엄마가 미웠다.
꼭 그래야 했을까?
밤무대 가수와 미국 군인이었던 부부의 집에 식모로 있던, 먼 친척 고모의 주선으로 내가 발탁 되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딸이 다섯인데 왜 나였을까?
난 아직도 엄마에게 그 질문 만큼은 할 수가 없다.
갓난쟁이때부터 유독 많이 울고, 까실았던 아이였단다. 입도 짧고 불같은 성향의 아이의 입을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그리 여기셨을까?
사흘 피죽을 먹어도 내 새끼 때국으로 못 보낸다!
고래고래 고함치셨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지금 한국인이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공순이가 되었다.
쌀을 불리고 솥단지에 올려, 아궁이에 불지펴 쩌낸 짤밥을 절구통에 넣고, 쿵덕 쿵덕,,,
그 위에 삶은 녹두를 대충으깨 버무려 놓은 찰떡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눈물로 손수 빚은 찰떡은 내 입에 들어갈 찰떡이 아니었다. 이모집에 어린 딸과 들여 질 선물이었던 것이다.
부산행 기차에서 그리도 많은 눈물을 쏟아 냈다는 얘길 듣기 까지 44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엄마의 눈물은 가슴에 돌댕이가 되었던 것이다.
엄마에게 돌댕이로 남은 그 녹두 찰떡이 나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맛난 떡으로 남아있다.
속으로 품고 내어 놓은자와 거저 나온 자의 차이일까?
거슬러 올라간다.
갯벌의 짠내나는 그 아이는 공순이가 되어 스스로 세상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