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는 중
데미안에서, 스스로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끝내 반만 사람이 된다.
40대를 향해 가는 시점에서,
비로소 나답게 있을 수 있는 곳에
서 있는 느낌이다.
기존에 몰랐던 나의 새로운 면을
알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나이 또래 사람들처럼
일편일률적인 과정을 밟아가며 살아가야 했던
한국에서 벗어나,
그 정해진 길 밖에 서게 되었기 때문일까.
스스로를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돌아보면 나는,
순리를 거스르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알맞은 때를 기다리다 보니,
돌고돌아 마흔을 향해가는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내가 그려왔던 곳에 서 있게 되었다.
미처 몰랐던 것은,
그곳이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안다면,
되도록 빨리
그 환경으로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 새로운 환경에서,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을 마주한다.
내가 그려왔던 환상과 현실 간의 괴리에 놀라
좌절하기도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며 용기를 낸다.
아이를 낳고 돌아간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 속에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매몰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40대 이후의 내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
사는 대로 살아가게 될까 두려워졌다.
지금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나라하게 나를 알아가며,
아이와 성장하며,
더 훗날의 나를 그려보고 있다.
아이를 돌보며,
학업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혼자서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체력도 감정의 여유도 부족하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자립되지 않은
내 모습이 자꾸 나를 작게 만든다.
나를 작게 만드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여기에는 나를 잡는 것도 없고,
한국에서는 가족들이 돌아오라 손짓한다.
우리가 돌아가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친구들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곳에서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주 천천히,
여기에서도 내 삶이 만들어져가고 있다.
작고 보잘것없이 보여도,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하나씩 놓이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일궈내고 있다.
이곳의 자연과 뜨거운 햇살이,
글감이 되어 나를 자극한다.
그리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하나하나 놓칠새라, 모두 글에 담고 있다.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내 인생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딸, 며느리라는 나의 역할에서 한 발 물러나니,
엄마라는 역할과
결국 ‘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해야하는 의무에서
조금 벗어나,
내가 원하는 것을 들여다본다.
때로 비워진 시간 앞에서,
당황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고,
그것으로 나의 삶을 채워가고 있다.
그리고 먼 훗날에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평생 살아가고 싶은 모습으로
살기 시작한 것 같다.
연구를 하고,
대학으로 출퇴근을 하고,
운동을 하고,
해변을 따라 달리고,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친다.
역할과 의무가 걷히고 나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엄마’와 ‘나’가 남는다.
나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점도 있다.
아파트보다 주택이 좋고,
한두 평 더 넓은 거실보다,
작아도
바깥바람을 느낄 수 있는 발코니를 애정한다.
에어컨과 난방이 완비된,
보안 철저한 현대적인 아파트보다
난방이 되지 않아
냉동실처럼 춥고,
한 달에 한 번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이 낡은 아파트가 더 마음에 든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고 있다.
바다 가까이에 사는 기쁨이 크다.
해변을 풍경삼아 아침을 먹고,
아이를 학교에 내려준 뒤
해변을 달린다.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눈을 감고 느끼고,
한국에서 온 아이의 책을 찾으러
우체국에 들렀다 집에 돌아왔다.
청소기를 돌리고,
식기세척기를 돌린 뒤
부엌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글을 쓴다.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하고 감사한 하루.
이제는
조금씩 훗날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면 매일 마주치는
중년의 호주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싱그러운 10대, 20대가 아닌
무르익은 50대, 60대가 누리고 있는
그들의 삶이 나의 삶이 되길.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새벽에 일어나 락풀에 가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언젠가 나의 손자 손녀와 손잡고,
함께 강아지를 산책 시키며
따스하게 늙어가고 싶다.
나는 지금 용기를 내는 중이다.
한국에서,
뉴질랜드에서,
시드니 해변가에서, 모래사장에서,
한 발자국씩 바다와 가까워지고 있다.
혼자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들어갈 용기를 내는 중이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내가 좋아해서,
내가 원해서,
그렇게 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