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익 대량학살 센터와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
2024.02.25.
캄보디아의 어두운 역사 속으로: 청아익 대량학살 센터와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 다음, 택시 를 타고 청아익 대량학살 센터로 갔다. 이곳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폴 포트 정권 하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의 현장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장소다.
매표소에서 입장권과 오디오 가이드를 받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돈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그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을 마주한다. 당시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학살장소와 유골 위령탑에 애도의 눈물이 난다.
축복 속에 태어나서 가족과, 이웃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자의 폭력에 힘없이 주저 앉아 한 점의 해골로 남아 위령탑 전시실에 켜켜이 쌓여있다.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도 끔찍하다. 이곳은 원래 고등학교였으나 수많은 사람들의 고문과 처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비명소리를 감추기 위해 한 밤중에도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아 당시에는 그곳에서 고문이 자행되는 줄 몰랐단다.
박물관 내부에는 고문 도구와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쇠고랑에 묶여 몸이 조각나고 장기가 적출되는 고문에 몸부림치며 바짝 말라비틀어진 사람, 어떤 희생자는 아랫도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얼굴은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상태로 인간적인 존중 없이 사진으로 찍혀 이곳을 방문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죽어서도 국가가 그에게 폭력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당국에선 그 당시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이런 자극적인 장면을 전시한 걸까? 그는 발가벗겨지고 고문당해 뒤틀려진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을 원치 않을 것 같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론 놀은 1970년 3월, 시아누크 왕을 축출하고 군부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크메르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던 중 미국은 북베트남군 보급로를 막겠다며 베트남 캄보디아 국경지역에 엄청난 폭격을 가한다.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와 난민을 낳았다.
당시 캄보디아 론놀정권에서의 경제적 불평등과 부패와 미국과 베트남 전쟁의 틈에 끼어 고통을 당하는 등 여러 이유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다. 폴 포트는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이용하여 지지를 얻고,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고 론 놀은 1975년 크메르루주에게 패배하여 미국으로 망명하고 그 자리를 폴포트와 크메르루주에게 물려준다.
프랑스 유학시절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폴포트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하며 극단적인 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급자족적 농업 중심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잔혹한 폭력과 대량학살로 이어졌으며,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는 도시를 비우고 농촌으로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켜 집단 농업을 시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한, 지식인, 예술가, 종교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폴 포트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무너졌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Heng Samrin) 정권으로 넘어갔다. 헹 삼린은 캄보디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을 수립하고,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루주 잔당과의 전쟁을 벌였다.
이후 1993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는 민주 선거를 통해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회복하게 되었다. 현재 캄보디아는 훈센(Hun Sen)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통치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23년 부패인식지수(CPI)는 180개국 중 158위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보다 8 계단 하락한 순위로,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현 위정자들은 좋은 정치를 할 생각은 안 하고 툭하면 폴포트에 문제의 원인을 돌리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도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나오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