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_9958
"박 선수님"
"박 교수님 말고 박 선수님이라고 불러드릴게요."
동료가 웃으며 던진 한 마디였다. 학과 회의를 마친 후였는데, 뭔가 묘했다. 그 순간 마음이 우쭐해졌다. '선수'라는 단어가 주는 현장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책상 앞의 이론가가 아닌,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인정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턴가 학교에서 종종 들리기 시작한 이 호칭.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점점 진심이 담긴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전문가의 진짜 조건
오늘 읽은 책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돈다.
"학력, 경력, 작품... 그것들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진짜 전문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 그렇구나.
박사 학위도, 10년 경력도, 수상 경력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작 현실에서 마주한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이라면, 그건 진짜 '선수'가 아니다.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
그제야 왜 동료들이 나를 '선수'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히딩크가 진짜 ‘선수’였던 이유
2002년, 거스 히딩크.
그가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건 단순한 전술의 승리가 아니었다. 한국 축구의 고질병을 정확히 진단했기 때문이다.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 눈치 보기, 소통 부재.
히딩크는 이 문제의 핵심을 꿰뚫었다. 그리고 수평적 팀워크라는 해답을 제시했다. 박지성이 홍명보에게 거침없이 명보 형이라고 이름을 의견을 말하는 팀. 나이와 경력을 넘어 자유롭게 소통하는 조직.
문제를 읽었고, 해결했고, 결과가 따라왔다.
그는 진짜 '선수'였다.
내가 선수였던 순간들
돌이켜보니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학생이 가져온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여기서 흐름이 끊어져요"라고 말할 때. 편집본을 보며 "이 컷이 너무 길어서 집중력이 떨어져"라고 짚어줄 때. 캐릭터 설정에서 "이 인물의 동기가 약해 보여"라고 피드백할 때.
그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아, 그게 문제였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나는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이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 진짜 '선수'였다.
지선이후능정(知善而後能正)
고전 『대학』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선함을 안 뒤에야 올바르게 할 수 있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식을 넘어 지혜로, 이론을 넘어 실행으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전문가, 선수가 된다.
선수가 되기 위한 다짐
책을 덮고 나서 마음속에 하나의 각오가 생겼다.
학생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와도, 그 문제의 핵심을 보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아는 사람이 아니라, 풀 수 있는 사람으로.
"박 선수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계속 나를 단련해야 한다.
현장에서, 문제 앞에서, 학생들의 고민 속에서.
진짜 선수로 거듭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