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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그리기 전에, 인간은 먼저 세상을 잘라서 보았다.”
Ep.3에서 우리는 동굴의 화가를 만났다.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다리를 겹쳐 그리던 천재.
하지만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그는 왜 움직임을 그리려 했을까?
왜 배경을 모두 지우고 동물만 남겼을까?
왜 ‘순간’만 강조했을까?
답은 단순하다.
그는 화가이기 전에 사냥꾼이었다.
사냥은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속도도, 청각도, 후각도 인간은 동물보다 처참하게 열세였다.
그런데 승리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력.
사냥에서 ‘시선의 편집’은 곧 생존이었다.
사냥터는 정보의 폭풍이었다.
바람 소리, 발자국, 풀 냄새, 빛의 반사, 동료의 위치…
이 모든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려는 순간,
생존 가능성은 즉시 0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선택했다.
사슴의 전체 모습 → 삭제
이동 방향 → 집중
풍경 전체 → 삭제
던질 타이밍 → 극대화
소리 대부분 → 삭제
풀잎의 미세한 흔들림 → 확대
이건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의미를 남기고, 노이즈를 지우는 고도의 편집 과정이었다.
3만 년 전 사냥꾼의 뇌 속에서는
이미 필름 편집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 화가는 이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벽에는 사슴만 있다.
배경이 없는 것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생존의 시각 구조가 곧 예술의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냥은 정지된 장면이 아니라
초당 24프레임으로 흘러가는 액션 영화였다.
사슴이 고개를 든다.
판단 시간 0.5초.
지금인가?
아닌가?
바위 뒤인가? 풀숲인가?
이 컷을 잘못 읽으면 죽는다.
사냥은 시간의 리듬을 읽는 기술이었다.
언제 정지하고, 언제 빠지고, 언제 던질 것인가.
초보자는 장면 전체를 보려고 한다.
고수는 필요한 순간만 자른다.
이건 영화 편집의 본질과 같다.
의미 없는 장면을 덜어내고, 중요 순간만 남기는 기술.
사냥꾼은 이미 감독이었다.
사냥이 끝나면 불 앞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재생이 시작된다.
“아까 사슴이 풀숲에서 튀어나왔지?”
“아니야, 돌 오른쪽이었어.”
“네가 돌진할 때 표정이… 미쳤었어.”
이 기억은 날것이 아니다.
정확한 기록도 아니다.
재구성된 하이라이트다.
재미있게, 극적으로, 의미 있게 편집된 이야기.
이건 단순한 잡담이 아니다.
지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이야기는 데이터를 압축한 생존의 도구였고,
동굴벽은 그 데이터를 저장하는 최초의 하드디스크였다.
2025년.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린다.
카메라는 모든 것을 보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계산량이 폭발한다.
그래서 AI는 인간처럼 선택한다.
중요한 객체만 인식한다.
필요 없는 픽셀은 버린다.
움직임의 방향을 예측한다.
위험 신호만 강화한다.
이건 사냥꾼이 하던 방식과 동일하다.
AI는 인간의 시각 진화 전략을 그대로 모방한다.
단지 목적이 다를 뿐이다.
사냥꾼은 살기 위해,
AI는 계산을 위해 세상을 잘라본다.
3만 년 전: 사냥꾼의 눈 → 생존의 프레임
3만 년 전: 동굴 벽화 → 이미지의 프레임
19세기: 카메라 → 기계적 프레임
20세기: 영화 → 시간의 프레임
21세기: AI → 데이터의 프레임
형태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다.
“인간은 세상을 그대로 보지 않는다.
필요에 맞게 재구성해 본다.”
오늘 우리는 사슴 대신 광고를 쫓고,
맘모스 대신 정보 속 가짜 신호와 싸운다.
하지만 시선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사냥꾼의 프레임이
동굴 벽화가 되고,
영화가 되고,
AI가 되기까지
3만 년이 걸렸다.
그리고 여전히 질문은 같다.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버릴 것인가?”
우리는 아직도 사냥꾼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다만 사냥감만 바뀌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