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美食의 정치학] 호텔에서 마주한 태국의 근대화 흔적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 태국 방콕

by 아틀라스

나는 겨울의 방콕을 참 좋아한다. 방콕의 여름이 매일 40도에 육박하는 온도와 습기로 여행자를 지치게 만드는데 비해, 겨울이 되면 '이런 날씨가 동남아에도?' 싶을 정도의 산뜻한 날씨가 여행자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든다.


얼마 전 방문한 방콕에서 오랜만에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애프터눈티를 즐기기 위해 들렀다. 최근 방콕에도 리츠칼튼, 로즈우드, 카펠라 등 최고급 호텔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짜오프라야 강변에 위치한 이 호텔이야말로 고풍스러움 가운데 세련됨을 잃지 않는 럭셔리 호텔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물론 현대적인 럭셔리 호텔도 좋아하지만, 왠지 나는 아직 이런 유서깊은 전통과 역사를 품은 독특한 호텔에 좀 더 끌리는 것 같다.

만다린 오리엔탈 방콕 로비


로비를 지나 Author's Lounge에 도착해서 애프터눈티를 주문해본다. 마침 일본 딸기 디저트 시즌이라 딸기 테마의 애프터눈티 세트 하나와 오리엔탈 타이 티 세트 하나씩을 주문했다. (Author's Lounge는 각자 다른 티 세트 주문 가능)

천장의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 때문에 마치 필터를 씌운 듯한 모습의 Author's Lounge


'작가의 라운지'라는 명칭에 걸맞게 Author's Lounge는 19세기 말부터 이 호텔을 거쳐간 수많은 유명작가들의 사진을 한쪽에 비치해 두었다.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수많은 작가들이 이 호텔에서 작품활동을 하거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라운지 벽 한 켠에 쭉 진열돼 있는 작가 사진들


또한 현재도 태국 왕실이 자주 찾는 이 호텔은, 영국의 찰스 국왕,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 각국 왕족이나 정치인들이 거쳐가기도 했고, 알프레드 히치콕, 엘튼 존, 톰 크루즈 등 유명 예술가나 연예인들도 방콕을 방문할 때 즐겨 찾던 호텔이라고 하니, 그 자부심이 알 만하다.


(좌) 시즈널 메뉴인 스트로베리 티세트. 녹색 책 모양의 디저트 트레이를 가져와서 빼내면 디저트들이 담겨있다. (우) 타이식 오리엔탈 티세트


티 세트가 도착하고 천천히 차의 향을 음미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사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출라롱콘(Chulalongkorn)대왕(라마 5세)이 1897년 유럽 순방 시, 영국 이튼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그의 아들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출라롱콘 대왕은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제정세가 어지러웠던 19세기 말-20세기 초 당시 태국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자신의 왕자들을 유럽 각 국으로 유학을 보내 서구식 문물과 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인물이다. 그 영향으로 행정, 군사, 교육 등 태국 사회의 많은 부분이 근대화되었으며 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의 식민지배를 피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현재 태국의 최고 명문대인 출라롱콘대 역시 그의 아들인 라마 6세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좌) 1887년 오리엔탈호텔 (우) 현재의 만다린 오리엔탈 (출처: flickr)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은 1863년 The Oriental Hotel이라는 이름으로 두 명의 미국인에 의해 처음 설립됐으나 2년 만에 화재로 인해 건물이 전소되고, 1876년 두 명의 덴마크인에 의해 같은 이름으로 새로 지어져, 당시 전통 태국식 여관만 존재하던 시암 왕국(오늘날의 태국) 최초의 서구식 고급호텔로 거듭나게 된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던 당시 국왕 라마 5세 역시 오리엔탈 호텔 개장에 높은 관심을 보였고, 19세기 말부터 태국 왕실과 귀족들도 호텔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 후로 세월이 흐르며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기도 하고, 2차 대전 시기에는 일본군 간부들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다시 태국 왕실과 유명인들이 즐겨 찾으면서 호텔은 점점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1950년에는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영부인인 엘레노어 루즈벨트가 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문했을 때 1,000여 명의 게스트들과 함께 오리엔탈 호텔에서 오찬행사를 즐기기도 했다. 이후 1974년 홍콩의 The Mandarin 호텔이 오리엔탈 호텔을 인수하면서 1985년 마침내 'The Mandarin Oriental' 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였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럭셔리 호텔로 거듭나게 된다. (홍콩에 있는 만다린 오리엔탈은 또다른 의미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홍콩의 유명배우 故 장국영이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좌)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우) 2024년에도 여전히 팬들은 기일이 되면 추모를 한다. (출처: Wikipedia / South China Morning Post)


그렇게 시작된 태국의 첫 고급호텔이 이제는 세계적인 럭셔리 호텔 브랜드의 기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태국을 대표하는 호텔로 자리잡고 있다. 왕실과, 귀족, 작가와 예술가들이 머물던 이 공간에서 차를 마시다보면 이 호텔의 역사와 유산을 그대로 흡수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따뜻한 차 한 잔과 방콕의 겨울을 가장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 終-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