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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Kim May 08. 2021

어버이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부모님 사랑합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부모님 뵈러 추모원에 가야겠지만, 올해는 먼 이국땅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며 생각합니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썼던 글에서 살아 계실 때 부모님과 함께 했던 기억을 꺼냅니다.  


2007년 6월 기록에 적혀 있는 부모님과의 시간.


"회사일과 학교일로 바쁘게 지내는 시간 속에서 6개월만에 고향에 내려간 날.

버스로 5시간을 고속도로를 달린 후 고향에 도착. 새벽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고향집에 왔을 때 너무 좋았다.  다음날 부모님 모시고 저녁을 먹으로 밖으로 나갔다. 유명한 오리고기집이었는데, 토요일이라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주인에게 잠시 기다릴테니까 자리 생기면 달라고 하여, 힘들게 택시타고 오신 부모님과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정중하게 이야기를 하고 자리가 생겨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식사를 사주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부모님께 맛있는 것을 많이 사주는 것만큼 기분이 좋고 행복한 순간도 없는 것 같다.


다음날, 일요일에는 어머니께서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망막이 안좋으셔서 손톱, 발톱도 잘 못깍으셔서 거실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어머니 발톱과 손톱을 깍아드렸다. 어머니 발톱과 손톱을 깍아드리면서 문득 전에 어떤 책에 있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반드시 해야할 일' 이런 비슷한 책에서 보았던 내용이 생각났다. 정성스럽게 갂아 드리면서, 마음속으로 건강하시고 오래 사시라고 빌었다. 어머니께서도 내가 갂아줄 때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놓인다고 하셨다.


부모님이 해주신 밥을 이틀동안 먹었는데, 찰밥이 정말로 맛있었다. 약 4개월 넘게 혼자생활하면서 주로 외식을 먹었는데 역시 고향에서 부모님이 해주신 밥만큼 세상에서 맛있는 밥은 없는 것 같다.


정말 부모님은 아무것도 안해줘도 나를 낳아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존경스러우시다.

그리고 비록 여유로운 형편을 물려주시진 않으셨지만, 그 보다 훨씬 더 갚어치 있고 가치있는 지혜로움과 현명함을 가르쳐주신 것 같아서 세상에서 부모님이 가장 존경스럽다. "


2013년 10월 20일. 일요일. 어머니 입원.

"밤새 어머니가 한숨도 못주무시고 복부팽창이 있고 아침에 밥 드시는데 조금 숨을 어렵게 쉬면서 식사를 하셔서 오전에 바로 마산의료원에 갔다. 오전 11시쯤 응급실에서 어머니 심박동수를 측정했다. 그리고 담당 의사과장님이 오셔서 엑스레이 찍은 사진 보여주시면서 9월초 퇴원할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하니 폐쪽이랑 심장쪽이 많이 부어서 상태가 안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기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다행이 가까이 있는 누나가 와서 어머니를 돌봐줬다.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오전에 사무실 출근했는데 11시쯤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 심장초음파 결과가 좋지 않다고 의료원에서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마산에서 가장 큰 삼성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바로 회사에 이야기를 하고 KTX 타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병원에서는 응급으로 콩팥수치가 매우 낮아서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머니께서는 약물로 치료하기를 원하셨다. 간호사가 나에게 어머니 과거 병이나 증세 물어봐서 기록했었던 것들을 말씀드렸다.

-44세에 당뇨병이 왔고. 2010년에 백내장 수술 하셨고. 2006년에 뇌경색와서 오른쪽 반이 마비되셔서 6개월 후 정말 기적처럼 회복하셨던 이야기. 2007년에 쓸개수술하셨던 이야기.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오후 5시. 의사가 나를 불렀다. 상태가 안좋으니 투석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어머니께서 원치 않으셨고, 심장초음파 결과 때문에 온건데 하면서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잠시 후 심장쪽 결과가 나왔는데 결과는 정상 심장 수치의 반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콩팥수치가 안좋다고 투석이 필요하다고 의사는 계속 권고하는데, 어머니는 싫다고 하셔서 어머니의 뜻을 계속 따랐다.

밤 9시.

수혈 2개 맞고 조금 괜찮으셨다가, 주무시려고 누우셨을 때 힘이 없으시고 숨을 쉬기 힘들어하셨다. 앉아있다가 누우시면 숨쉬기 많이 힘들어하셨다. 오후때만해도 투석 안하시려고 했는데, 밤되니 투석해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다.

밤 10시반.

상황이 더 악화되어 급히 혈관투석 준비에 들어갔다. 위험성을 듣고 동의서를 쓰고 중환자입원실로 이동했다.

밤 11시 반.

어머니 혈관투석시술에 들어갔다. 의사가 부작용 위험 이야기를 한 것도 마음에 걸려서 부디 무사히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엇다. 밖에서 대기하는데 어머니 힘들어하는 소리 들으니까 마음이 너무 안좋았다. 20여분 후에 다행이 혈관투석은 잘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2016년 여름에 더이상 부모님 두분만 고향에 두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자녀 집으로 두분을 모셨다.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셨지만, 자녀들과 함께, 좀 더 가까이 모시고 싶어서 부득이 부모님을 설득해서 강원도 공기 좋은 곳으로 모셨다. 그리고 나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동안이라도 더 자주 뵙고 싶고, 2016년 초에 둘째도 태어나는 상황에서 너무 바쁜 업무로 인해 개인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휴직을 하려고 생각하던 참에, 대학교에 산학교수로 옮기게 되어 내 시간을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예전보다는 자주 뵈러 갔다. 어머니는 누나 집에서 머무시면서 상태가 좋으셨다가, 안좋으셨다가 하시면서 점차 기력을 잃어가고 계셨다.


2017년 1월. 설날.

설날 전날에 강원도에 도착해서 어머니를 뵙고 인사를 드렸다. 여전히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시고 계셨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몸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드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 설날 당일에 어머니를 깨웠는데 온몸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계셨다. 이날은 어머니 투석하러 가는 날이기에 아침에 입을 힘겹게 벌리시고 입에 음식을 떠넣어 드렸다.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따뜻하게 옷을 입히고 휠체어를 끌고 장애인 택시를 불러서 모시고 10여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런데 뒤에 계신 어머니를 불러도 주무시는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는 몰랐다. 투석을 받기 위해 보내드렸는데 보통 몇 시간 걸리기에 집에 돌아와야 하는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밖에 기다렸는데 의사선생님이 다급하게 환자가 맥박이 없다고 하는데, 그말을 듣고 하늘이 노랗고 믿기지 않았다. 급하게 119를 불러서 옆에 큰 병원에서 소생을 하는데, ...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시고 하늘나라로 먼길을 떠나셨다... 너무 많이 울었다. 힘들때마다 기댈 수 있었고, 언제나 어머니의 품은 포근하고 따뜻했는데, 이제 더이상 이 세상에 마음편히 기대고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 어머니가 안계시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어머니의 얼굴과 손은 차디찼다. 돌아가셔도 귀가 가장 늦게 닫힌다는 말에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씀을 여러번 드렸다... 그렇게 2017년 1월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렸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너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아들은 가장으로, 두 아이의 아빠로써 어머니께서 걱정안하셔도 될만큼 잘 성장했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셨던 늘 겸손하게 살아라고 하신 말씀, 술 많이 먹지 마라, 아버지가 늘 고되게 일하셔서 저보고는 늘 펜으로 먹고 사는 일을 하길 바라셨던 것처럼, 지금 아들은 교수가 되어 어머니께서 늘 바라시던 대로 펜으로 먹고 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고싶습니다. 늘 아들을 위해 공을 비셨던 것, 그런 공들 덕분에 아들 앞에 있던 많은 장애물을 없애주신 것들, 너무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나셨다. 2살때 광복을 하고 한국으로 건너오셔서 7살때 6.25 전쟁을 겪고 피난길로 북면으로 오셔서 20살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그리고 18년이 지나 38세때 늦둥이 아들을 얻어셨다. 그리고 몇년 후 당뇨병을 진단 받았을 때 몇년 못사시는 줄 아시고 어린 아들이 못먹는거 먹고 지내지는 않을지 늘 걱정하셨던 어머니. 평생을 병원을 다니고 약을 달고 사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아들은 나쁜 길에 빠질 뻔해도 결국은 다시 돌아와서 감사하게도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2017년 1월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리던 겨울,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고, 아버지는 다음해 다리를 다치셨다. 평소에 늘 걷기 운동을 하시고, 평생 몸으로 일을 하셔서 건강하신 편이었는데, 한번 다리를 다치신 이후로는 급격이 기력을 잃으셨다. 그리고 2018년에, 심근경색이 와서 급히 스텐스 시술을 하셨다.

2019년 봄부터 다시 몸이 좋지 않으셔서, 결국 입원을 하시고, 더 악화되어 중환자실 입원을 하셨다. 아버지가 입원하실 때는 쓴 글이 없어서 기억을 더듬는다. 치매도 약간 있으셔서 입원실에 계실 때도 누나들을 종종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런데 아들이 온다고 누나가 말하면 기억이 좀 선명해지시고, 내가 갈때는 종종 상태가 조금 좋아지셔서 말씀도 나누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이제 더이상 회복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최대한 자주 뵈러 오라고 했다. 서울에서 본업이 있다보니 어쩔수 없이 강의를 위해 다시 서울에 복귀했다.


어느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제발 괜찮기를 바라면서 새벽에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차를 몰고 병원에 갔다. 중환자입원실에서 나와서 간호사실 바로 옆으로 나와계셨다. 그 옆에 다른 환자분도 나와계셨는데 혈압이 4-50 정도 되셨고, 몇시간 남지 않았다고 가족들이 모두 와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계셨다. 제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면서 밤을 새웠는데, 다행이 그날은 고비를 넘기셨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치료가 힘들다고 해서 근처 가톨릭 요양원으로 모셨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기 전에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의 슬픔으로 남아, 아버지를 뵐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씀과, 함께 지금까지 저희 네 형제를 키우고 먹여살린다고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 드렸다. 그렇게 그해 가을에 아버지도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버지. 한평생 힘들게 일만 하다가, 우리 6가족 먹여 살린다고 쉼없이 일을 하시다가. 떠나신 아버지. 너무 감사드리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본 받고 아들도 이렇게 부지런히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저희 형제들도 이렇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며, 아들도 이렇게 부지런히 잘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늘 말씀해주셨던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는 법이라고 하셨던 말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비록 함께한 시간이 부족해서 함께 추억을 많이 만들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몸으로 마음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느끼며, 감사한 마음으로 앞으로도 더욱 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정신이 또렷하셨을 때 저에게 하셨던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이 험난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어머니의 지혜로움 덕분에 아들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실제 1933년생으로, 47살에 늦둥이 아들을 가지셨다. 내가 세상을 인식할 때는 이미 아버지는 50대가 되었고, 내가 어릴때 우리가족이 외식을 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와 즐겁게 논 기억도 없고, 부모님과 어릴 때 어디 놀러가본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늘 새벽같이 일 하러 나가시고, 오후에 오시면 늘 술을 가득 드시고 오셨다. 그것 때문에 자주 집에서 부모님의 다툼이 잦았고, 사춘기때는 그런 것이 너무 싫어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술을 원망하기도 했고. 돈을 원망하기도 했다. 다툼의 대부분은 돈 때문이었기에. 어머니는 누나들이 돈을 벌어서 옷을 사주기 전에는 늘 몸빼바지를 입으시며 제대로 된 옷을 사신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외식한 기억은 중학교 졸업하고 졸업식 때 학교 앞 중국집에서 같이 먹었던 기억. 그래도 어려운 시절에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40년 평생 힘든 일을 하셨다.


내가 18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정년퇴직하게 되시면서 그때 나에게 인생의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계시긴 했지만, 내가 이제 가장이 되어서 책임감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신 차리고 고2때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대학에 가고, 부모님은 아들 비싼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는 더운 여름에 조경일을 하시고, 어머니도 편찮은 몸을 이끌고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다가 손가락 절단될 뻔한 일도 겪으셨고, 아버지는 70세에 암 판정을 받은 다음에야 일로부터 자유로워지실 수 있었다.



오늘은 어버이의 날입니다. 늘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어머니의 지혜로움 덕분에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늘 생각하며, 감사해하며, 주변사람들에게 더 많이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를 믿고 있는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여행한 기억도, 외식한 기억도, 즐겁게 논 기억은 없지만, 두 분이 아들을 위해 빚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부단이 노력하셨던 것, 늘 잘되도록 기도하셨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정말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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