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 AL Riyadh. 하지르, 바누 하니파.
2023년 1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도시, 리야드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이번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면서 여러 생각이 났다.
우리 가족은 2020년 10월 3일, 코로나가 전 세계를 한참 휩쓸고 있을 시기에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으로 왔다. 첫 느낌은 온통 도시가 노란색 모래색으로 물들어져 있는 도시였고, 공항에서 학교 호텔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이 그냥 사막 형태로 남아있었다.
여기는 리야드(Riyadh), 알리야드(Al Riyadh)라고도 한다.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전 리야드 지역은 하지르라고 불렸으며 바누 하니파(Banu Hanifa, بنو حنيفة) 부족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르는 알야마마 지방의 수도였다. Hajr al-Yamamah로도 알려졌다. 그림 1에서 보는 지역이 알야마마 지역이다. 알야마마 지방관은 우마이야 왕조와 아비스 왕조 시기에 아라비아반도의 동부와 중부 대부분을 다스렸다.
하지르(Hajr) al-Yamamah 지역의 통치자로는 Tasm and Jadis (folklore) Hanifities가 있다. 고대 정착지로 대략 5세기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서 출현하여 16세기까지 현대 리야드의 남동쪽 외곽 지역까지 존재했다. Hajr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통제에서 지역을 분리하고 수도를 al-Kharj로 옮기기 전 866년까지 역사적으로 al-Yamamah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후 하지르(Hajr)는 디리야(Diriyah) 및 만푸하(Manfuhah)와 같은 이웃과의 충돌과 장기간의 가뭄으로 쇠퇴의 시기를 겪었다.
다양한 역사적 설명과 민속에 따르면 하지르(Hajr)는 기원전 1천 년 경 잃어버린 아라비아 부족인 Tasm과 Jadis에 의해 설립되었다. 예맨의 Kinda왕국에 의해 이후에 합병되었고, 바누 하니파(Banu Hanifa)가 이슬람이 도래하기 2세기 전까지 거주했다.
Hanifa와 관련된 곳들이 리야드에 여러 곳이 있다. 특히 리야드 남쪽에 Wadi Hanifah가 있다.
8세기 아바스 혁명에서 우마이야 왕조가 전복된 후 하지르는 아바스 칼리프 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바누 우카이드히르 부족에 의해 분리될 때까지 알-야마마 지역의 중심이었다. 유명한 14세기 모로코 여행자이자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하지를(Hajr)를 여행하며, “아랍 종파가 거주하는 강과 나무가 있는 훌륭하고 비옥한 도시”라고 묘사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바누 하니파(Banu Hanifa) 출신이고, 그들의 통치자는 Tafail bin Ghanem이다. 라고 했다.
바누 하니파는 알야마마 지역에 거주하는 고대 아랍 부족이다. 사우디왕가가 바누 하니파에 속한다. 동쪽에 있는 Nejd(당시에는 Al-Yamama로 알려짐), Al-Irdh 계곡을 따라 작은 정착촌에 살다가 지역이 생겼다. 이 지역이 Wadi Hanifa. 전설에 따르면 바누 하니파 부족은 Hejaz에서 알 야마마(Al Yamama)로 옮겼다. 이 지역의 기존 Tasm과 Jadis는 이 전쟁으로 인해 모두 죽었다고 알려졌다. 무함마드 시대에 바누 하니파 부족이 무함마드와 군사적 충돌에 가담했다. 무함마드는 무함마드 이븐 마슬라마(Muhammad ibn Maslamah) 원정을 627년 7월 명령. 무하마드 빈 마슬라마가 이끄는 30명의 무슬림 소대가 군사 임무를 위해 파견되었다. 바누 하니파는 전통적인 이슬람 연대기에 따르면 632년경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표단을 보냈다. 대표단에는 무사일리마(Musaylima)도 포함되어 있었다 [1].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 후 바누 하니파는 무사일리마가 이끄는 그들의 새로운 종교(이슬람)를 버렸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배교 전쟁이 발발 [2]. 무슬림은 무사일리마가 사망한 세 번째 전투 후 승리했다.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은 나머지 바누 하니파는 무슬림과 평화를 이루고 이슬림으로 돌아왔다.
올드 리야드, 리야드의 시작은 Al-Yamama, Wadi Hanifa, Diriyah, Najd, Irqah 쪽에서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하지르(Hajr)는 나중에 여러 개의 별도 정착지와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리야드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언급은 1590년의 사건에 대해 보고한 17세기 연대기에서 나온다. 1737년 이웃 만푸하에서 온 난민인 데함 이븐 다와스가 리야드를 장악했다. Ibn Daw는 이 지역의 다양한 오아시스 마을을 둘러싸는 단일 벽을 건설하여 효과적인 단일 도시로 만들었다. “정원”을 의미하는 “리야드”라는 이름은 이러한 초기 오아시스 마을을 나타낸다.
1744년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합은 인근 마을 디리야(Diriyah)의 통치자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동맹을 맺는다. 이븐 사우드는 이슬람 국가의 통치하에 두려는 목표를 가지고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리야드의 Ibn Dawwas는 Al Kharj, Al Ahsa, Najran의 바누 얌(Banu Yam) 일족과 연합하여 단호한 저항을 했다. 그러나 Ibn Dawwas는 도망갔고 리야드는 1744년에 사우드에 항복하여 오랜 전쟁을 끝내고 Diriyah를 수도로 하는 첫 번째 사우디 국가의 선언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사우디 국가는 오스만 제국을 대신하여 행동한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오스만 군은 1818년 사우디의 수도 디리야를 파괴했다. 그리고 나즈드에 수비대를 유지했다. 이것은 잠시동안 사우드 가문의 쇠태를 의미했다.
투르키 빈 압둘라 알 사우드(1755-1834)는 두 번째 사우디 국가의 첫 번째 아미르가 되었다. Nejd의 Emir로 1819-1820년 동안 통치했다. 1823년 투르키 빈 압둘라는 리야드를 새로운 수도로 선택했다. 1834년 투르키가 암살당하고 그의 장남 파이살 빈 투르키 알 사우드(1785-1865)는 암살자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집트 총독의 통제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Nejd는 다시 침략되었고 파이잘은 포로로 잡혀 카이로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 파이살은 5년의 투옥 끝에 탈출하여 나즈드로 돌아와 다시 통치를 시작했고 1865년까지 통치했으며 사우드 가문의 통치를 강화했다.
파이살이 사망한 후 아들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했고, 파이살의 아들 중 한 명이 압둘라 빈 파이잘 알 사우드(1831-1889), 무함마드 빈 라시드는 나즈드(Najd)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었으며 1871년 하사(Hassa)도 점령했다. Hassa는 지금은 후푸프로 잘 알려져 있는 지역이다. 파이살의 아들은 다시 Nejd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1891년까지 통치했다. 투르키의 손자들 사이에 내부 투쟁으로 1891년 북부 도시 하일(Hail)에서 통치하던 라이벌 알 라시드 가문의 의해 제2사우디 국가가 몰락했다.
알-마스막(al-Masmak) 요새는 그때부터 지어졌다. 마스막 요새/마시막 궁전은 1865년 네지드의 에미르인 압둘라 빈 파이잘 알 사우드(1831-1889)에 의해 시작되었다.
압둘 라흐만 빈 파이살 빈 사우드는 나지드 외곽의 부족 공동체에서 피난처를 찾은 후 가족과 함께 쿠웨이트로 가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압둘 아지즈는 1902년 조상의 땅인 나지드를 되찾았고, 1926년까지 그의 통치를 공고히 했으며 그의 왕국을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도록 더욱 확장했다. 1932년 9월, 리야드를 수도로 하여 자신의 왕국을 사우디아라비아로 명명했다.
[1] 바누 하니파, https://hmn.wiki/ko/Banu_Hanifa
[2] 배교 전쟁, https://ar.wikipedia.org/wiki/%D8%AD%D8%B1%D9%88%D8%A8_%D8%A7%D9%84%D8%B1%D8%AF%D8%A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