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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24살, 장관상을 받다.

롤러 코스트와 같았던 한 해

by Dr Kim

아버지가 직장암 3기라는 소식에 가족들 모두 하늘이 노랬다. 아직 우리 가족 중에 암환자는 처음이었고, 그동안 너무 고생했던 아버지가, 아들이 이제 취업하고 조금 쉴 수 있으실 때 직장암 3기라니. 더구나 아버지 혼자 병원에 가서 검사하시고 집에 돌아와서는 술을 드시면서 며칠을 말씀 안 하셨다고 하셨다. 혼자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결국 어머니가 알아서 가족들이 비상이 걸렸다. 하필이면 처음 증상이 나왔을 때만 해도 보험이 있었는데, 몇 달 뒤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고 공식 진단을 받았을 때는 보험도 만료된 지 한 달 지난 뒤였다. 집에 돈이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절망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살리자는 데는 아무도 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 마산에 있는 큰 병원, 부산에 있는 큰 병원 등 많은 곳을 알아봤는데, 운 좋게도 큰 자형이 알아봐 주셔서 일산에 있는 국립암센터에 입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장장 5년간 부모님은 수시로 기차 타고 마산에서 서울로 오셔서 큰누나 집에서 며칠씩 머무르면서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그리고 아버지 상태가 3기이긴 하지만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새로운 항암치료제를 임상 실험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병원에서 이야기를 했다. 한번 항암 치료하는데도 십만 원 이상 나가는데, 우리는 좋다고 하기도 하고 돈도 여유롭지 않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다행히 그 효과가 꽤 좋았다. 아버지는 육체적일을 하셨기 때문에 평소에도 계속 몸을 움직이시는데, 암병원에서도 하루에 몇 바퀴씩 병원을 걸으셨다고 하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계속 걷기 운동을 하루에도 꽤 많이 하신 덕분에 항암치료를 잘 견디시고 빨리 회복하신 것 같다.



회사 생활은 재미있었다. 당시 격주 토요일 근무하는 시기였는데, 토요일에는 보통 클라이언트는 쉬기 때문에 우리 팀 사람들은 홍대 사무실에 모여서 토요일 오전에는 팀 세미나를 하면서 서로 기술 교류를 하고, 끝나고는 스타크래프트를 팀전으로 하면서 서로 친목을 다졌다. 팀에 사람이 더 필요한 상황이어서 팀장님이 추천을 해달라고 해서 같은 스터디 그룹에 실력 좋은 형을 추천해 드렸다. 그런데 회사에서 처음에는 반대를 했단다. 왜냐고 물어보니 그 형이 전문대 출신이라 회사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팀장님은 그것에 화를 내셨고, 나중에 잘 돼서 그 형이 입사할 수 있었지만, 어느 날 그것 관련해서 엄청나게 술을 많이 드시고 회사의 생리구조에 분개하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비록 5-60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회사 임원들이 주로 글로벌 컨설팅 펌 출신들이고, 학벌도 다들 좋은 편이어서, 컨설턴트로써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져가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쪽 분야는 실력이 꽤 중요한 편이어서 팀장님이 어렵게 회사에 설득을 해서 그 형을 우리 팀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아서앤더슨(Arthur Andersen)에서 매니저로 일하시다가 20대 후반에 이사로 이 회사로 스카우트되신 팀장님은 회사와 균열이 좀 간 것 같았다.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면서 점차 목표가 생겼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목표였는데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겼다. 금융회사에서 내 분야의 임원이 되는 것이 이 당시의 나의 목표였다. 이 때는 내 눈에 보이는 최대한의 높이가 금융기업의 임원이었다.


2004년 4월에는 모 통신사 고객사 대상으로 강의를 맡게 되었다. 하루 종일 하는 강의였는데 내가 오전 파트, 그리고 같은 팀 형이 오후 파트를 맡았다. 최근 주요한 기술동향에 대한 것이었는데 24살에 처음으로 어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강의를 하게 되다 보니 많이 긴장했다. 팀에 선배들은 다들 나보고 가면 다들 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부담 없이 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강의 내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팀장님이 리뷰해 주시면서 질문을 하셨는데 내가 그 질문에 100% 완벽하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팀장님은 그 내용을 기술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영역인데도 100% 이해하시면서 쉽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공학 전공도 아니고 경영 전공이시고 회계사이고, 회계법인 출신이신데도 명료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을 보고 감탄스럽고,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대망의 외부 강의를 하게 되는 날 매우 긴장해서 전날 잠을 잘 잘 수 없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서초동에 있는 통신사로 출근해서 강의를 준비하는데 뭔가 실습 환경이 제대로 준비한 대로 되지 않았다. 다들 선배님들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초롱초롱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3시간 동안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강의를 하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왜 이렇게 말도 못 하고, 설명도 못하냐고.


나는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수능 때도 국어가 정말 망쳤듯이 뭔가 말을 하고자 하면 내가 원했던 대로, 생각했던 대로 말이 잘 나오지 않고, 상대방이 오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10대 후반에는 아예 말을 안 하기로 한동안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쪽 컴퓨터와 대화하는 것이 편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회사는 컨설턴트로써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매번 내가 진행한 업무를 클라이언트에게 발표하도록 만들고, 외부에 강의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매우 챌린지 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못하고 약했던 부분들이 강제적으로 계속하게 되니까 아주 서서히 늘기 시작했다. 사람은 적응과 변화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말을 너무 못 했기 때문에 첫 강의 이후에 인터넷 카페를 찾아다니면서 발표하는 카페에 가입했다. 그리고 여러 번 정모도 나가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모여서 발표 연습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사회에서 동 떨어진 히키코모리 같았던 나의 성격이 어느새 다른 사람이 보기에 외향적인 성격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사 동기였던 형은 내가 3년 정도 지났을 때 나보고 "OO이 처음에 말도 제대로 못하더니, 이제 말솜씨가 제법 늘었다"라고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교수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내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그런 경험 빨로 상대방에게 의사전달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여전히 일상 대화는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또 하나의 재미있었던 경험은 서울역 앞에 있는 연세빌딩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였다. 같은 팀 동료 형과 함께 프로젝트를 나가서 진행했다. 당시 회사는 모 통신사의 핸드폰을 제조하는 회사였다. 우리는 새벽 늦게까지 계속해서 일을 했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프로젝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내가 그 결과를 처음 찾았을 때 윤리적인 부분에서 갈등을 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결과물을 경쟁사에 제공한다면 엄청난 돈을 받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나의 직업윤리상 말도 안 되는 안 좋은 것이었길래 그러한 생각은 던져 버렸다.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적지 않은 유혹들이 생기는데, 그럴 때일수록 소탐대실하지 않도록 윤리적인 마인드를 잘 가져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프로젝트였다. 실제 주변에 지인들 중 몇 명은 그러한 단기간의 유혹에 이끌려 잘못된 길을 가다가 결국에는 이쪽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평판이 안 좋아져서 인생의 험난한 길로 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그리고 해외로 간 그녀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적응하느라 바쁜 것인지 아님 나를 잊은 것인지. 그럴 때일수록 더욱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우리 팀에 또 다른 형이 들어왔다. 역시나 같은 스터디 그룹에서 만난 형인데 실력이 나보다 월등이 좋았다. 그런데 이쪽 분야의 특성상 일찍이 이쪽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학교 공부에 소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역시 이 형도 그것 때문에 조금 발목이 잡혔으나, 우리 팀장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팀에 들어올 수 있었고 놀랄 만큼 좋은 성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 해 11월에 국내에서 대회가 열렸다. 1등이 정보통신부 장관상이었다. 나는 우리 팀 동료 형들에게 설득했다. 같이 대회에 나가자고. 대회에 나간 가장 큰 이유는 보잘것없었던, 가진 것 아무것도 없고, 내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뭔가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자랑해 보이고 싶었다. 11월에 대회가 열렸다. 뛰어난 경쟁자들이 많이 왔다. 나와 두 형은 서로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고, 결과적으로 운 좋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대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생 처음으로 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은 진대제 장관님이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분이었기에 장관상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큰 가문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그 해 수능 부정이 터져서 그걸 해결하느라 장관님은 오지 못하고 차관님이 오셔서 수상을 해주셨는데 아주 약간 아쉬웠다. 그러나 이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이 없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던 나의 커리어에 한 줄기 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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